요즘 퇴근길에 문득 코끝에 스치는 향이 있다. 은은한 향기의 여운이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다. 쥐똥나무 꽃 향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차분해 번잡한 일상에서 산만해지고 상기됐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쥐똥나무는 회양목처럼 생울타리로 많이 심는데 단정한 모양을 내기 위해 전지(剪枝)를 심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도심 자투리 공원이나 언덕배기에 심은 것들은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가며 자란다. 이런 곳을 지날 때면 향기가 한층 진하게 풍겨온다.
밤이 되면 향이 더 짙어진다. 낮보다 밤에 꽃 향기가 한층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우선 밤에는 시각이 둔해지는 대신 후각이 훨씬 민감해져서 향을 더 잘 느끼게 된다. 또 밤에는 기온과 기압 변화로 꽃 향기가 대기 속으로 흩어지지 않고 일정한 농도를 유지한 채 퍼져 우리들의 후각에 잘 와 닿는다. 비 오는 날(저기압이 통과 중인 때)에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낮게 깔리는 이치와 비슷하다. 어려서 시골 살 때 비 오는 날 초가집 굴뚝 주위로 연기가 깔리는 광경을 많이 봤다.
쥐똥나무는 황해 이남 지역의 산기슭과 계곡 등에 자생하는 키 2~4m 정도의 관목이다. 북한산이나 관악산 계곡에서도 볼 수 있다. 언젠가 이맘때쯤 제주의 한 오름에 올랐다가 쥐똥나무 군락을 만난 적이 있다. 어찌나 진한 향기가 나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바람이 억센 바닷가 오름에서는 땅에 바짝 붙어 자라기도 한다. 쥐똥이란 이름은 가을에 까맣게 익는 열매가 영락 없이 쥐똥 닮아서 붙여졌다. 이름은 비호감이지만 앙증맞게 총상화서(總狀花序ㆍ긴 꽃대에 꽃자루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는 꽃차례)로 핀 흰 꽃은 청초하기 그지 없다. 자세히 보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터이다.
꽃 향기로도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개화 시기가 조금 빨라지긴 했지만 쥐똥나무 꽃 향이 퍼지기 시작하면 초여름이다. 아까시 꽃 향기가 진동할 때는 봄이 깊다. 동요 ‘고향땅’의 가사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대목처럼 아까시 꽃 피어 짙은 향이 퍼지면 뻐꾸기 우는 늦봄이다. 올해는 아까시 꽃 필 무렵에 2~3일 간격으로 비가 내려 그 현기증 나는 향기를 별로 즐길 수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아직 대기에 냉기가 감도는 이른봄 밤 우리 주변에서 맨 먼저 꽃 향기를 선사하는 식물은 회양목이다. 작은 연한 연두색 꽃송이가 녹색 잎과 비슷해 대부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알싸한 향이 꽤 진하다. 회양목 꽃 향기가 코 끝에 스칠 때 나는 아 이제 봄이구나 하고 느낀다. 후각이 비교적 예민한 내 나름대로 봄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방식이다.
이어 매화가 피고 늦가을까지 수많은 풀과 나무들이 바통을 이어가며 꽃 향기를 피워낸다.
매화 향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옛 선비들이 매화 향을 가까이 했던 이유는 이런 진정 작용을 통해 단정한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는 효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4월 중순쯤의 라일락 향과 5월의 아까시 향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효과가 있다. 5월에서 6월에 걸쳐 피는 장미꽃도 그렇다. 일종의 흥분제라고 할까. 연인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라일락은 원래 5월의 꽃이었지만 온난화 탓인지 이젠 4월 중하순에 만개해 4월의 꽃이 되었다. 살구꽃, 벚꽃, 앵두꽃은 향이 거의 없다. 이른 봄에 피는 진달래도 향이 없지만 4월 중하순에 피는 철쭉은 칼칼한 향이 꽤 강하게 풍긴다.
야생 장미라고 할 수 있는 찔레꽃은 은근한 향이 일품이다. 찔레꽃 향은 어린 시절 시골 산길이나 울타리에서 많이 맡았다. 요즘도 찔레 향을 맡으면 그 시절 들뜨고 누군가 그리웠던 기분이 되살아난다. 향과 냄새는 기억과 관련이 깊다.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마들렌 과자 냄새로 기억을 되살려 가는 장면이 나온다. 특정 냄새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용을 ‘마들렌 효과’또는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르는 연유다.
5월 밤의 꽃 향기 가운데 오동나무 꽃 향을 빼놓을 수 없다. 2주 전까지만 해도 회사 18층사무실 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오동나무 향이 언뜻언뜻 코끝에 스쳤다. 길쭉한 고깔 모양의 오동나무 꽃을 직접 코에 대고 맡으면 아찔하게 진한 향이 끼쳐온다. 오동나무는 도심에서도 저절로 싹을 틔워 왕성하게 자란다. 솥뚜껑 만한 잎들로 탄소동화작용을 해 한 철만 자라도 거의 어른 키 높이만큼이다. 빌딩 옆 작은 녹지 같은 데 어느새 자리를 잡아 봄이 되면 꽃을 피우기 때문에 서울에서 오동나무 꽃 향 맡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6월은 밤꽃 세상이다. 밤나무 많은 시골 동네는 온통 밤꽃 향기로 뒤덮인다. 비릿한 향이 남성 정액 냄새와 유사해 맡기 민망해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6월 산하는 원초적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밤꽃 향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밤 주산지인 공주시 정안면을 밤꽃이 한창인 때에 천안_논산간 고속도로를 통해 지날 때면 고속버스 안에까지 밤꽃 향이 진하게 스며든다.
밤꽃에서 이런 향이 나는 것은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sperm(정자)이라는 어근이 시사하듯이 이 성분은 남성 정액에 많다. 정액 특유의 냄새도 바로 이 성분 때문인데, 염기성이어서 산성인 여성의 질 내부 환경에서 수정이 이뤄질 때까지 정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밤꽃 중에도 수꽃에만 이 성분이 있는데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밤꽃 꿀은 다른 꿀에 비해 아미노산 함량이 높고, 항산화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안과 제주도 등 도서지방에 자생하는 구실잣밤나무도 밤꽃과 비슷한 향이 난다. 5월 중순에서 6월 초 제주 공항에서 내리면 트랩을 나서는 순간 비릿한 구실잣밤나무 꽃 향이 훅 끼친다. 이맘때쯤 제주도 전체가 구실잣밤나무 향으로 뒤덮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월 하순에서 6월 초 밤나무가 없는 도심에서도 밤꽃 향과 비슷한 향을 맡을 수 있다. 가죽나무 꽃에서 풍기는 향이다. 가죽나무는 워낙 자생력이 강해 오동나무처럼 작은 녹지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란다. 생장 속도도 오동나무 못지 않게 빠르다.
밤꽃 향을 내는 나무는 또 있다. 덜꿩나무와 가막살나무다. 정원과 도심 소공원에 조경수로 많이 심는 작은키 나무다. 5월 중에 작은 흰 꽃들이 뭉쳐 피면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이 같은 특징은 덜꿩나무 학명‘Viburnum erosum’에 표시돼 있다. 학명 가운데 종소명 ‘erosum’이 바로 에로틱(erotic)에서 유래한 것인데, 정액 냄새 나는 특징을 나타낸다. 5월 산행 중 밤꽃 필 때가 아닌데 왜 밤꽃 냄새가 나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덜꿩나무 꽃 향이었다.
덜꿩과 가막살나무는 꽃과 잎 모양이 아주 유사해 구분하기 어렵지만 잎자루와 줄기 사이 겨드랑이에 참새 혀 같은 작은 턱잎이 있으면 덜꿩, 없으면 가막살나무다. 나는 ‘덜턱가무’라고 외운다. 덜꿩나무에는 턱잎이 있고 가막살나무에는 턱잎이 없는 특징을 ‘사자성어’로 기억하는 것이다.
6월 밤꽃이 지고 나면 밤길에 한동안 꽃 향기가 뜸해진다. 여름 꽃들이 줄지어 피지만 일부러 코를 갖다 대지 않으면 향을 느끼기 어렵다. 옥잠화와 자귀나무 꽃은 코를 들이대고 맡아보면 상큼한 향이 풍긴다. 지리산 주변 지역에서는 옥잠화 향으로 향수를 만들기도 한다.
여름이 깊어질 즈음, 어느 날 어떤 상큼한 향이 훅 끼치는 날이 있다. 싸리 꽃 향이다. 시골 산소 주변에서 많이 맡던 향이다. 이른 추석을 앞두고 벌초하면서 꽃핀 싸리를 베어내던 기억이 새롭다. 여름철 등산길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향이다. 비슷한 시기 산행에서 칡꽃 향을 빼놓을 수 없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짙은 향이 풍겨온다면 거의 틀림 없이 칡꽃 향이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9월 중순쯤 밤길을 가는데 갑자기 단내가 확 풍긴다. 만주 북방이 고향인 계수나무가 가장 먼저 가을이 오는 것을 감지하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는 향이다. 이어 국화 향이다. 화단에 심은 국화를 비롯해서 산과 들에 구절초, 산국, 감국 향이 진해지면 가을이 깊다. 2월 말 대기에 찬 기운이 아직 쌩쌩한 가운데 피어나던 회양목 꽃 향으로 시작한 식물들의 긴 향의 여정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도심과 산야는 이듬해 봄까지 긴 ‘향의 침묵’에 잠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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