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예상을 뛰어넘은, 통통한 몸집의 바틀비의 선언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자네 미쳤어?” “왜 거절하는 거지?” “무엇이든 자네 자신에 대해 말해주겠어?” 분노와 호기심을 넘어 애원조로 바뀐 변호사의 명령에 바틀비의 저 수동적 거절이 반복되면서 웃음소리는 하나 둘 줄어든다.
5일까지 서울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필경사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원작 소설을 담백한 무대로 재현했다. 세련된 소품, 조명이나 소름 돋는 연기는 없지만 원작의 대사(한기욱 역, 창비세계문학)가 그대로 무대에서 읊조려질 때 드라마 ‘미생’에서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을 만난 듯한 묘한 쾌감이 오기도 한다.
1850년대 미국 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타협적인 화자(변호사)와 비타협적인 주인공(바틀비)을 대비시킨 소설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란 저 독특한 어구의 반복을 통해 문학성과 사회성, 철학성을 폭넓게 담는다. 월가 한 법률사무소의 필경사(타자기, 복사기 발명 전 법률문서를 손으로 직접 옮겨 적는 일을 하던 사람) 바틀비는 밤낮으로 일하다 취직 3일째 되는 날, 변호사의 업무 지시에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며 거부한다. 그는 권력 사슬과 계약에 기초한 사회질서와 사적 소유, 심지어 밥 먹는 것조차 거부한다. 바틀비가 저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할 때마다, 무언가를 당연시하며 살아온 주변인들의 삶에는 균열이 생긴다.
원작의 절대적인 스타일을 만들었던 변호사의 진술은 연극에서 여성 자아를 추가로 내세워 변호사와 여자의 대화, 변호사의 방백으로 처리했다. 변호사 역의 문일수는 원작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재현하지만, 월가의 자본가보단 질풍노도의 젊은 친구를 감싸려는 나이 많은 노신사 인상이 강하다.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 애처로운 기품, 치유할 수 없는 고독”의 바틀비는 오동통한 몸매의 이상홍이 맡았다. 원작 속 바틀비가 기이한 느낌(uncanny)을 준다면 무대 위 바틀비는 일상에 찌들다 번아웃 된 직장인의 모습이다. 오전 오후에 번갈아 미치는 터키, 니퍼즈와 12살짜리 사환 진저넛은 최요한이 맡았다. 모자를 번갈아 쓰는 것만으로 세 역할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무대 분위기를 띄운다.
별도의 커튼콜 없이 변호사의 분신 여성이 쉬지 않고 필사하는 장면으로 연극은 끝을 맺고, 관객들은 어정쩡하게 박수를 치다 민망한 듯 극장을 빠져 나온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말만 머릿속에 맴도는 찝찝한 기분은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더 듣다 보면 우습기까지 하다”(소설가 김중혁)는 원작의 감상평과 일맥상통한다. 제작진이 의도한 걸까. 1544-1555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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