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에선 상처 가리려
2015년 야당 집권 성공 이후
‘승전기념식’ 대신 ‘추모의 날’
“민족 갈등 치유” 목적 내걸었지만
전쟁범죄 책임ㆍ처벌은 미온적
속으론 내전 모르쇠
새 민주정부에도 前 정부 그림자
前대통령은 국회로… 존재감 과시
민족 따라 내전 갈등 해소 온도차
“신할리즈族 지지 잃을라” 미온적
스리랑카 내전 종식을 기념하는 ‘추모의 날’인 올해 5월 18일, 수도 콜롬보에서는 매 해 벌어지던 군대의 승전 퍼레이드가 사라졌다. 대신 의회 근처에서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엄숙한 행사가 열렸다. 2009년 스리랑카 정부군과 북부의 타밀엘람해방호랑이 반군 사이의 내전이 종료된 이래 처음으로 이 추모행사에 희생된 타밀 민간인을 기리는 내용도 포함됐다.
추모일 지정도 2015년 당시 야권연합의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후보가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을 몰아내고 민주적 정권 교체에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루나세나 헤티아라치치(Karunasena Hettiarachchi) 스리랑카 국방 장관은 성명을 통해 군대 행진을 취소한 것은 “오랜 민족 갈등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라며 “(승전 기념) 행진을 대체한 문화 행사는 모든 민족간 화합을 위한 행사”라고 밝혔다.
그러나 스리랑카 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섬 북부의 소수민족 타밀족은 여전히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스리랑카 내전에서 양측에 의해 자행된 전쟁 범죄를 조사하고 특별 법정을 수립해 정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미온적이다. AFP통신에 따르면 비정부기구 국제문제그룹(ICG)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타밀족과 다수민족 신할리즈족 사이의 화해를 위해서는 전쟁 범죄의 책임자를 밝히고 처벌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정책은 거의 진전이 없다”고 지적했다.
내전 종료 8년 만에 찾은 추모행사
2년 전까지만 해도 5월 18일은 2009년 5월 18일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 반군을 제압한 것을 기념한 ‘승전일’이었다. 정부군은 최후 저항지인 물라이티부(Mullaitivu) 지역에 타밀 호랑이 반군을 몰아넣고 공격한 끝에 이날 반군 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을 사살하고 25년간 이어진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유엔 집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최소 4만명 이상의 타밀족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후 2015년 정권 교체 이전까지 타밀족은 집안에서 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을 기리는 사적인 추모 행사조차 열지 못했다. 타밀족의 자체 추모행사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은 2015년 대선으로 마힌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이 물러난 이후다. 신임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대통령은 정치의 민주적 개혁과 더불어 화해의 정치를 약속했고 타밀족의 추모 행사도 허용했다.
그러나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스리랑카 군부는 여전히 북부의 옛 전쟁터 일부를 점유하고 있으며, 지난해부터 허용된 추모 행사를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감시해왔다. 올해에도 여전히 추모 행사를 조직하려는 일부 시민운동가들이 체포되거나 정보요원의 감시와 방해공작에 시달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또 만약 추모 대상이 타밀 호랑이 반군에 가담한 인물이라면 그 행사는 불법이다.
타밀족은 스리랑카의 민주적 정권 교체 이후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전격적인 조치가 이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시리세나 정부는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내전 당시 전쟁 범죄를 다루는 특별 법정을 설치했지만 유엔이 제안한 대로 외국인 판사를 직접 참여시키는 대신 자문위원회를 설치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라자팍사 정권을 압박하던 국제사회도 전 정권보다는 서방 친화적인 새 정부에 대해서는 압박의 수위를 늦추고 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가 지난해 9월 공개한 스리랑카 내전 보고서는 2009년 내전 종결 직전에 스리랑카 정부군이 민간인이 밀집해 있던 병원ㆍ대피소를 포격하고 타밀 여성을 성폭행했으며 항복한 반군 지도자를 처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고서가 제안한 문제 해결책은 과거의 전쟁범죄를 처벌하는 것보다는 군부가 탈취한 사유지 반환, 목격자 보호 프로그램, 민권운동 보장, 피해자 치유 프로그램 등 향후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고 민간인 피해를 회복하는 데 집중됐다. 타밀족 입장에서는 정부는 물론 유엔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지경이다.
독재의 잔재, 신할리즈족의 태도도 미온적
시리세나 정부가 이처럼 내전 청산에 적극적이기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독재정권을 이어받은 민주 정권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시리세나 정부에는 라자팍사 정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내전을 종결한 라자팍사 전 대통령은 가족을 대거 내각에 들이는 족벌주의와 언론 장악을 통해 자신의 독재 정권을 강화했다. 통치 방식과 극심한 부패가 국민의 반감을 사며 2015년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그 해 8월에 국회의원직을 얻어 정계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더구나 시리세나 대통령 자신이 라자팍사 정권의 장관 출신이다. 시리세나 대통령의 집권기반인 스리랑카자유당(SLFP)은 라자팍사의 복귀로 인해 사실상 둘로 갈라진 상태다.
여기에 전 인구의 74%를 차지하는 신할리즈족이 타밀족의 전쟁 피해 조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스리랑카 시민단체 ‘정책대안센터’의 2014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신할리즈족 응답자 35%가 정부가 종족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충분히 역할을 했다고 응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3%였다. 타밀족은 거꾸로 40%가 정부가 종족 갈등 해소를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내전 기간 잔학행위 책임자를 전쟁범죄자로 재판하는 특별법정 설치에도 신할리즈족은 32%가 찬성하고 44%가 반대했다. 같은 질문에 타밀족의 84%가 찬성한다고 응답한 것과 대조된다.
이런 인구 지형에서 전쟁 범죄를 조사한다는 것은 인구 대부분의 지지를 잃겠다는 의미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도 이런 상황을 의식했기에 스리랑카와 정치적인 타협 끝에 시리세나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정책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시리세나 대통령이 이끄는 야권연합이 대선에 승리를 거둔 데에는 스리랑카 내 소수민족인 타밀족과 무어족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리세나 정부에는 여전히 타밀족의 요청에 응답할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전쟁 기간 잔학 행위의 책임자가 멀쩡히 살아 권력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외려 평화를 위협할 우려가 있다. 칠레, 차드, 라이베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 전환기 정권은 특별기구인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해 피해자들의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 요구와 반대 정당의 방해를 봉합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현재 상황은 이러한 위원회 설립조차 어려운 상태다. 전쟁의 상처는 언젠가 잊혀지겠지만,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는 망자를 제대로 기리지 못하는 타밀족의 고통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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