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에 빠진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는 단순무식한 남자. 이해심 넓은 노인…. 정형화된 조역들이 토대를 다지면, 복잡한 사정의 주역들이 얽히고설킨 인연을 풀어 놓는다.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 안톤 체홉의 전형적인 말하기 방식이다. 그의 대표작 ‘갈매기’는 어떠한가. 유명 여배우 아르까지나와 ‘새로운 연극’을 부르짖는 아들 뜨레쁠례프, 여배우를 꿈꾸는 니나, 유명 작가 뜨리고린의 사각관계를 축으로 예술과 인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한데 그들의 언어는 기실 말하기보다 읽기에 적합한 문어체, 번역체라는 것이 국내 연출진이 부딪힌 근본적 한계. 작품은 유명세만큼이나 자주 무대에 선보였고, 도전 횟수만큼이나 실패를 거듭한 ‘지겹고 졸린’ 희곡의 대표로 각인됐었다.
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는 국립극단의 ‘갈매기’는 이런 선입견을 날려버리는 감각적 무대를 선보인다. 4일 첫 공연한 이 작품은 루마니아 연출가 펠릭스 알렉사가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시골 별장을 무대에서 완전히 없애고, 객석까지 극장 시설을 활용해 모던한 무대로 꾸몄다.
뜨레쁠례프가 작가가 된 순간 수백장의 종이가 쏟아져 내려 무대를 뒤덮고, 실패한 여배우 니나가 ‘목이 마르다’라고 외치는 순간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이 무대‘기술’을 대극장의 물량공세라고 치부하기에는 해석이 꽤나 그럴듯하다. 객석과 무대가, 무대와 극중 무대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저들은 연극(예술)과 실제 삶이 구분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
펠릭스는 신구세대 대립, 애증관계로 요약된 ‘갈매기’의 평면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각 인물들이 견뎌내고 있는 시간을 무대에서 그린다. 그 중심에 한물간 여배우로 치부됐던 아르까지나가 있다. 아들의 전위극을 보고 “예술계에 대한 반항, 패배주의”라 비꼬는 그녀는 “난 항상 긴장하고 있다”고 외치며 도전과 실패를 반복, 강하게 살아남은 예술가로 거듭난다. ‘자연인인 배우와 극 중 등장인물이 일치하는’(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배우 이혜영이 맡은 이 역은 원작에 없는 오필리어의 독백까지 삽입, 시대를 풍미했던 아르까지나식 연기를 선보이며 설득력을 높였다.
뜨리고린 역을 맡은 이명행을 비롯해 오영수, 이창직, 박완규 등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견 배우들이 안정된 발성과 단단한 연기 내공으로 극을 이끈다. 반면 신인들이 꿰찬 뜨레쁠례프(김기수), 니나(강주희)는 극이 진행되며 자연스럽게 성장, 실패하는 ‘입체형 주역’을 치기 충만한 청춘으로 표현하는 데 그쳤다. 특히 강주희는 작품의 백미로 꼽히는 니나의 극 후반 대사를 대학입학 실기시험장에서나 볼만한 딱딱한 어투의 ‘소리침’으로 일관해 아쉬움을 남겼다. 1644-2003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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