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9일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상향(5조→10조원)하기로 한 것은 경제규모가 커지고 있음에도 대기업 기준이 지난 2009년 이래 8년째 유지되면서, 규제를 받는 기업의 수(48→65곳)만 늘어가고 있다는 재계의 강력한 요구를 반영한 조치다. “경제규모에 비해 규제대상의 규모가 늘어나는 속도가 빨랐다”는 것인데, 공정거래위원회는 원화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2007년 1,043조원에서 지난해 1,559조원으로 49.4% 증가한 것에 비해 같은 기간 대기업집단 자산합계는 1,162조원에서 2,388조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특히 올해 신규 편입된 대기업집단 명단에 인터넷기업인 카카오(자산 5조1,000억원)와 닭고기 가공업체 하림(9조9,000억원), 바이오 의약품업체 셀트리온(5조9,000억원) 등 코스닥 기업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기준에 대한 논란이 커졌다. “자산이 348조원에 달하는 삼성과 갓 5조원을 넘긴 카카오가 동일한 규제를 받는 것이 옳으냐”는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다. 실제로 이들은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돼 ▦상호ㆍ순환출자 금지 ▦채무보증 제한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덩치가 커졌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보게 됐다”는 푸념들이 쏟아졌다.
미적대던 공정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직후부터다. 박 대통령은 4월26일 언론사 편집ㆍ보도국장 간담회에서 "대기업집단 지정은 한국에만 있는 제도로, 반드시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며 "카카오처럼 뭘 좀 해보려고 하는데 대기업으로 지정돼 이것도 저것도 못하면 어떤 기업이 더 크려고 하겠느냐“고 직접 기업명까지 거론하며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공정위는 이날 대기업집단 기준 완화에 대해 “공정거래법상 규제와 이 규제를 원용한 38개 법령 규제를 동시에 받는다는 부담, 기업집단 규모와 관계없이 동일 수준의 규제가 적용돼 하위집단(자산 5조~10조원)의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이 퇴색한 게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상당하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대기업집단 기준을 상향하면 경제력 집중이 심화하고 중소기업ㆍ소상공인의 골목상권이 침해 받을 것이 우려된다”며 “기준은 현행 5조원으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실제 지난 8년 간 대기업집단의 평균자산은 2.5배(144.6%)나 증가하면서 현행 5조원 기준에서도 대기업의 경제력집중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상향 조정에 대한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한번에 기준을 두 배나 올린 것이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3년마다 한번씩 기준을 조정하기로 해놓고 한번에 10조원까지 기준을 올린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자산기준 완화에도 불구하고 일감 몰아주기 등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금지와 공시 의무는 현행 기준이 그대로 유지되고, 또 불공정거래는 공정거래법으로도 얼마든지 제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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