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이 그르노블에 들르고 싶어 하시는데…”
지난 5월, 청와대 참모가 얘기를 꺼냈다. 박근혜 대통령의 프랑스 국빈방문을 앞두고 경제사절단과 만났을 때였다. 그르노블은 42년 전 박 대통령이 6개월 간 유학한 프랑스의 작은 도시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추억 여행을 한다’는 비판을 피할 구실을 찾는 중이었다. 현대자동차 관계자가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협력사의 수소전기차 연구소가 마침 그르노블에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그르노블 방문은 그렇게 성사됐다.
박 대통령이 중동 4개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지난해 3월, 청와대 외교라인 관계자가 내린 ‘외교의 정의’를 잊지 못한다. 여러 기자들 앞에서 그는 말했다. “고객이 만족하면 성공한 외교다. 정상 외교의 고객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만족하셨으니 이번 순방도 성공이다.”
대한민국의 정상 외교가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보여준 장면들이다. 뭣이 중헌디? 대통령의 만족. 뭣이 중허냐고? 대통령의 눈 높이.
요즘 청년들의 노동이 ‘열정 페이’라면, 박 대통령의 외교는 ‘건강 페이’라 부를 만하다. 박 대통령은 살인적 순방 일정을 소화하느라 자주 아팠다. 인후염, 인두염, 위경련, 복통, 고열, 미열. 박 대통령이 앓았다고 청와대가 그간 공개한 증상과 병명들이다. 청와대는 그렇게 ‘박 대통령의 외교 투혼’을 널리 알렸다.
365일 24시간 국민만 생각한다는 박 대통령은 ‘링거를 맞아 가며 고생하는 외교’를 애국이자 애족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시장을 개척해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려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고, 그러니 국민이 감동하고 지지해 줘야 마땅하다고.
“대통령을 바쁘고 정신 없게 만들어야 우리가 일 좀 한다고 흡족해 하시니까…” 정부 인사는 얼마 전 ‘대통령이 아픈 것으로 끝나는 순방이 과연 정상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일정을 짜면서 우리끼리 ‘대통령을 돌린다’는 말을 쓴다”고도 했다.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순방 외교에 문화, 역사, 감성과 스토리텔링이 역할을 할 충분한 공간이 있을 리 없다. ‘정상회담-비즈니스 포럼-동포 간담회-한국전 참전비 헌화-K팝 또는 태권도 공연’이라는 패키지 일정이 박 대통령이 다닌 나라마다 기계적으로 반복된 이유다. 방문국 국기 색상의 의상을 입고 나와 방문국의 위인이 남긴 말을 현지어로 읊는 것은 박 대통령은 순방 공식이 됐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는 나라의 외교적 상상력이 고작 이 정도다.
결국 외교의 ‘가격’이 ‘품격’을 눌렀다. 청와대는 방문국에서 벌어들일 것으로 기대되는 최대치의 액수로 순방의 가치를 매기고 홍보했다. 상대국 국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제 나라를 찾아와 경제 성과를 올리느라 건강이 상했다는 외국 정상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양해각서(MOU) 건수와 금액을 앞세워 보도한 언론의 책임도 크다.
오래 갈 신뢰를 다지고 장기 전략을 고민하는 외교, 대한민국 소프트파워의 원천이 되는 대통령의 ‘창조 외교’를 기다린다. 스페인 국빈만찬에서 플라멩코를 추고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의 집으로 찾아가 포옹하며 고맙다고 말하는 대통령, 캐나다 한류 팬들을 만나 캐나다 국민가수 셀린 디옹의 노래를 한 소절 부르는 대통령, 인도 기업인들과 첨성대를 둘러보며 과학기술의 미래를 토론하는 대통령은 어떨까.
정상 외교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꾸자. 대통령이 정식으로 초청받지도 않은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가는 대신 아프리카 방문 약속을 지킨 것을 ‘한가하다’고 비꼬는 여론,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옷 갈아 입는 여행’이라 폄하하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한, 5년 단임의 대통령이 멀리 보는 외교를 하긴 어렵다.
정치부 최문선 차장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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