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희 미술감독은 충무로에선 유명 인사입니다. 2000년 ‘꽃섬’으로 한국영화계에 첫발을 디딘 뒤 충무로의 간판 역할을 한 작품들에 참여해 왔습니다. 영화계에서 미술하면 바로 류 감독을 떠올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아 왔습니다. 지난달 제69회 칸영화제에서 ‘아가씨’로 기술 스태프에게 주어지는 벌컨상을 국내 최초로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저력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류 감독은 1990년대 후반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수학했습니다. 당대 새 물결을 형성했던 쿠엔틴 타란티노와 폴 토머스 앤더슨 등의 영화를 보며 작가주의 감독들과 작업하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저예산영화 현장에서 서부극 세트와 씨름하던 어느 날 한국행을 결심합니다. 왕자웨이 감독의 ‘동사서독’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귀국한 뒤 “연도 없고” 미술감독이라는 직함도 낯설기만 해 일거리를 얻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힘겹게 첫 일감을 따냈지만 이후 류 감독의 행보는 거침 없습니다. 류 감독이 참여한 작품 면면만 보면 당장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의 연속입니다. 첫 상업영화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였습니다. 박찬욱 감독과는 ‘올드보이’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스토커’ 등을 함께 했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괴물’ ‘마더’에 참여했습니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유지태)을 보라색으로, 오대수(최민식)를 자주색으로 각각 표현해낸 아이디어는 바로 류 감독 솜씨입니다.
류 감독은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미국 시애틀에서 촬영하기에 휴양한다는 기분으로 참여했던” 영화 ‘만추’로 김태영 감독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과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 최동훈 감독의 ‘암살’에 합류해 1,000만 관객의 쾌감을 연달아 만끽했습니다.
충무로 일급 감독들하고만 작업을 해온 류 감독을 최근 만나 협업해온 영화감독들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각 감독들의 작업 방식이 궁금했습니다. 미술감독이라는 직업 때문일까요. 어떤 감독은 이런 점이 장점이다식의 직설적 표현보다 은유적인 수식을 동원했습니다. 류 감독은 “모두 아주 쉽지 않은 감독님들이고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신 분들”이라며 “정말 대단하고 기센 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봉준호 감독- “금광을 같이 캐는 듯한 느낌”
“봉준호 감독님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신 거 같습니다. 그분이 생각하시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같이 금광 캐듯이 일을 해내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봉 감독님이 형태를 제공할 수는 없지만 포착하고 있는 모든 지각들이나 텍스처, 정서들을 같이 찾아 다니게 됩니다. 그분이 생각하는 것을 오해하지 않고 놓치지 않고 포착을 잘 해서 정말 온전하게 그 세계를 구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만드는 감독님입니다.”
박찬욱 감독- “나쁜 남자와 여행하는 기분”
“박찬욱 감독님이랑 일을 시작할 때는 구체적인 걸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나쁜 남자와의 여행이라고 할까요. 항상 두려움이랑 설렘이 동반합니다. 분명히 잘못하면 훨씬 잃어버릴 게 많고 고통 당할 게 많을 수도 있는 위험이 있지만 잘 되면 굉장히 훌륭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기분인 거죠. 그래서 모험이나 여행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냥 일을 시작을 하고 일하면서 많은 부분을 만나고 거기에서 취사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게 까딱 잘못하면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는 부담감이 항상 있습니다. 서로 잘 되는 경우에는 정말 쾌감이 일어납니다. 선입견 없이 떠나는 좋은 여행의 동반자 같습니다. 정말 선진국형 리더, 탁월한 리더입니다. 눈높이가 엄청 높으실 텐데 (불만 표시 없이) 조용히 스태프를 끌고 가는 그런 리더입니다.”
류승완, 최동훈 감독-“열정 가득한 소년”
“류승완, 최동훈 감독님은 열정이 가득한 소년 같습니다. 최동훈 감독님 같은 경우는 이야기꾼이고 하고 싶은 게 많으십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님이 비주얼 측면에서 디테일하게 파고드는 스타일이라면 류승완, 최동훈 감독님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온도를 잘 측정해서 장르화 시킵니다. 그런 점이 재미있습니다.
김지운 감독-“세련된 감성의 소유자”
“김지운 감독님의 ‘달콤한 인생’을 참 좋아합니다. 상업적으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요. ‘올드보이’가 뜨거운 온도로 가는 영화라면, ‘달콤한 인생’은 좀 더 서늘한 느낌의 영화입니다. 김 감독님은 세련된 감성을 지니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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