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야간 미화원의 죽음
새벽 버스정류장에 검은색 차량
40, 50대 남성과 대화 뒤 동승
실종 2주 만에 금강변 시신 발견
면식범일까
10초간 얘기 나눈 뒤 바로 탑승
시신에 저항한 흔적도 별로 없어
사이코패스일까
보통 질식사와 달리 서서히 사망
가학 즐기는 인격 장애 가능성
남성 체액 발견됐지만
주변인ㆍ전과자 DNA 대조 허탕
CCTV 흐릿 차량번호 식별 실패
원점서 재수사 “범인 꼭 잡는다”
길바닥에 살얼음이 남아 있는 추운 겨울이었다. 2009년 2월 1일 저녁 6시쯤 대전 신탄진 금강변으로 산책을 나온 A씨는 그날따라 애완견이 유독 정신 사납게 고개를 돌리며 뭔가를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없이 뛰어가던 개를 쫓던 A씨는 메마른 수풀 속에서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다리가 풀렸다. 머리에 검은 비닐봉지가 씌워진 채 꽁꽁 언 시신이 거기에 있었다. A씨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즉각 수사에 나선 경찰은 시신이 열하루 전인 1월 21일 ‘미귀가자’로 신고된 이진숙(당시 57세ㆍ가명)씨라는 점을 확인했다. 검은 비닐봉지로 머리를 덮어 싼 것 외에 시신은 특이점이 없었다. 옷과 양말에는 피나 흙도 묻어 있지 않았다. 시신이 유기된 후 동물이 왼쪽 손등을 갉아먹은 자국 외엔 외상도 없었다. 그러나 옷 속에 가려진 시신에선 남성의 체액이 발견됐다. 누군가 이씨를 강간한 뒤 살해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보통 성폭력 사건에선 피해자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상처가 생기곤 하는데 이씨의 시신에선 폭행이나 흉기 사용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범인이 이씨의 목을 조른 자국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서서히 죽어간 이씨의 마지막 아침
이진숙씨가 ‘그’를 만난 건 2009년 1월 18일 새벽. 충북 청주시 대형마트의 야간 미화원이었던 이씨는 매일 밤 10시쯤 마트 영업이 끝난 뒤 청소를 시작해 오전 5시면 일을 마쳤다. 마트에서 약 4㎞ 떨어진 청주 모충동에 살던 이씨는 6시쯤 도착하는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씨는 버스 시간 전까지 지하 1층 미화원 대기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 마트를 나섰다. 8개월 전 마트 일을 시작한 뒤 매일 반복된 일과다.
그날도 첫 버스 도착 10분 전쯤 이씨가 마트를 나서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남아 있었다. 살짝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청주 가경동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린 지 약 5분이 흘렀다. 그러나 매일 제시간에 도착하던 버스는 그날따라 보이지 않았다. 오전 6시쯤 버스 대신 등장한 건 검정색 트라제 XG 차량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던 차는 갑자기 유턴한 뒤 이씨가 서 있는 방향으로 갔다. 운전자는 이씨와 약 15m 떨어진 길거리에 차량을 세우고 3분간 멈췄다 다시 버스정류장 앞으로 차를 움직였다. 40~5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이씨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10초 남짓 짧은 대화가 오갔다. 이씨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량에 탑승했다. 차는 오전 6시 3분 청주 모충동 방향으로 출발했다. 이씨가 기다리던 버스는 그로부터 2분 뒤 도착했다.
같은 날 오전 6시 20분쯤 모충동 인근에서 이씨의 휴대폰 전원이 꺼진 뒤 그는 완전히 행방불명 됐다. 그리고 2주가 지나 실종된 청주 버스정류장에서 약 28㎞ 떨어진 대전 금강변에서 이씨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면식범? 가학적 고통 즐기는 사이코패스?
부검 결과 이씨는 그날 오전 8~9시쯤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 뭔가에 목이 졸려 숨이 끊긴 것이다. 부검의에 따르면 목이 졸려 급사하는 보통의 질식사와 달리 이씨는 서서히 죽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범인이 손으로 이씨의 목을 졸랐거나 끈 같은 다른 도구로 조른 자국도 없었다. 머리에 뒤집어씌운 검은 비닐봉지를 고정시키기 위해 두 번 묶은 매듭. 그 자국이 이씨 목에 남은 유일한 흔적이었다. 범인이 부드러운 수건 등으로 입을 막아 질식시켰을 가능성도 있지만 시신 발견 장소에선 다른 범행 추정 도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팀은 이씨 머리에 씌워진 비닐봉지를 보고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하나는 범인이 면식범일 가능성. 평소 이씨와 알고 지내던 범인이 범행 과정에서 이씨가 죽자 죄책감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씨 사후 머리에 비닐을 씌웠다는 추정이다. 면식범의 소행으로 볼 정황도 많았다. CCTV 확인 결과 사건 당일 이씨가 용의자와 아주 잠깐 얘기를 나눈 뒤 바로 차에 탑승한 점, 이씨의 저항이 심하지 않은 점도 의심할 만 했다. (▶ 시신 얼굴 가리는 심리는)
그러나 손으로 목을 조르지 않고 비닐봉지를 묶었다는 점에서 다른 의심도 가능했다. 범인이 비닐봉지를 씌워 이씨를 성폭행하며 서서히 질식사 시켰을 가능성이다. 범인이 피해자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성적 만족을 느끼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사이코패스)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경찰은 수사 초기 면식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주변 인물 중 용의자를 찾으려 했다. 경찰이 우선 주목한 사람은 과거 이씨와 같은 동네에 살던 박모(당시 70세ㆍ가명)씨였다. 10년 전부터 알던 사이인 박씨가 이씨에게 일부러 돈을 빌려준 뒤 따로 만나자며 치근덕거렸다는 주변 진술도 나왔다. 하지만 박씨의 유전자정보(DNA)는 시신에서 나온 것과 전혀 달랐다. 다른 주변 인물도 수사했지만 용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유사 전과자 DNA 대조에서도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범인 차량 행방도 오리무중
다른 실마리는 용의자가 타고 있던 차량이었다. 그러나 이씨의 마지막 모습이 찍힌 주정차 단속 CCTV는 화질이 나빠 차량번호를 식별할 수 없었다. 경찰은 범행 전후 실종 현장 및 시신이 발견된 곳 인근을 지나가거나 청주ㆍ대전 등 인근에 등록된 트라제XG 차량 등 약 1만 7,300여대를 조사해 그 소유자나 운전자 중 알리바이가 불확실한 약 800여명의 DNA를 확인했다. 그러나 범인의 DNA와 일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약 1년간 주변 인물, 전과자 등 1,000여명의 유전자를 확인했으나 마찬가지 결과였다. 범인이 죽은 게 아니라면 그는 7년 전 이씨를 살해한 뒤 경찰에 잡히지 않은 채 과거를 숨기고 지금도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범인이 자취를 감춘 것처럼, 청주 시민들의 머릿속에서도 이씨 사건은 잊혀지고 있다. 이씨가 일하던 마트에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당시 사건을 알고 있다던 미화원 박모(59)씨도 12일 “범인이 벌써 잡힌 것 아니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가족들조차 고통 때문에 사건 해결에 대한 기대를 놓은 상황에서 경찰은 이씨의 원한을 풀 유일한 방법은 범인을 잡는 것뿐이라고 본다. 지난 2월 초, 7년 전 이씨가 발견됐던 그 즈음에 맞춰 충북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원들은 사건 파일에 적힌 범인의 동선과 현장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사건을 되짚었다고 한다. 이씨가 발견된 금강변 유기 현장에서 형사들은 이씨의 영혼을 달래며 소주 한 잔도 건넸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그 놈’은 꼭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잡을 겁니다.”제보 전화 (043)240-2980.
청주=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 잊어도 될 범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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