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슬러와 GM에 공적자금 투입
2008년 여론 반대 무릎쓴 부시
파산 직전 200억弗 긴급자금 수혈
오바마도 부담 감수 회생 결정
‘좀비 기업’ 살린 日사례 반면교사
자동차 업계는 살 깎는 고통분담
수익성보다 품질과 경쟁력에 초점
정부 미래車 기술 확보 노력 등
34만개 일자리 창출하며 정상궤도
현대모비스 섀시 모듈 현지 공장
“크라이슬러에 올해 23만대 납품”
지난 1일 미국 3대 자동차업체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오하이오 ‘톨레도 콤플렉스’. 미국 5대호 중 하나인 이리호 인근 200 에이커(80만㎡ㆍ24만5,000평) 평원에 자리잡은 콤플렉스의 ‘스티크니’ 구역에 들어서자 낯익은 공장이 눈에 띄었다. 크라이슬러의 베스트셀러 ‘지프 랭글러’에 장착될 ‘완성형 섀시 모듈’을 공급하는 현대모비스 조립공장이다.
5,000평 가까운 공장 안에서는 미국 근로자 100여명이 모비스 방식의 최적화된 기법에 따라 ‘섀시 모듈’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 본사에서 파견 나온 김영석 차장은 “크라이슬러 차량 판매가 증가하면서 올해 모듈 출고량도 23만대에 달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2006년 7월 출범한 모비스 미주법인은 10년 만에 정상궤도에 오른 게 분명해 보였다. 밤잠 안자고 일한 한국 파견 직원과 현지 근로자, 크라이슬러의 협조 등이 일궈낸 성과일 것이다. 하지만 1등 공신을 꼽으라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빼 놓을 수 없다. 낮은 생산성과 형편없는 품질, 관료주의가 겹쳐 파산 직전에 놓였던 크라이슬러를 공중분해 하는 대신 공적자금을 투입해 새 기업으로 만드는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코트라 디트로이트 무역관 전병제 관장은 “8년 전 두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없었다면 모비스 미주법인은 물론이고 미국 자동차 산업의 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전문가들도 2008년과 2009년 이뤄진 크라이슬러와 GM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정치적 위험을 감수한 두 대통령의 결단 ▦이해관계자의 고통분담 ▦해당 기업의 과감한 변신이 결합된 성공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직속 경제자문회의 멤버로 구조조정 작업에 참여했던 어스턴 굴스비 시카코대 교수는 최근 학술지에 기고한 ‘구조조정 평가 보고서에서 “감성적 논리에 빠진 여론 반대에도 불구,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학자들의 자문을 토대로 GM과 크라이슬러를 회생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최소 100만명 대량 실직과 막대한 사회보장 비용 지출이 불가피하다는 자문회의 분석이 오바마 대통령의 여론을 무시한 결단에 바탕이 됐다. 굴스비 교수는 또 “크라이슬러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회생과 파산을 주장하는 비율이 50대50으로 갈렸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정치적 부담을 안고 회생 결정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금융위기를 초래한 실패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부시 전 대통령도 필요한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굴스비 교수에 따르면 2008년 12월 부시 전 대통령이 200억달러의 긴급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미 자동차 업계는 오바마 정부의 공적자금 수혈을 받지 못한 채 파산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11월 대선을 앞두고 민심에 극도로 민감한 미 의회는 ‘부실 기업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여론 때문에 자동차 업계의 자금 요청을 거부한 상태였다. 부시 전 대통령은 회고록 ‘결정의 순간들’에서 “나의 신념(시장원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거시경제에 미칠 파장과 내 후임자를 위해 비난을 감수하고 자금 지원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정치적 결단은 신속하고 과감한 후속 작업을 이끌어냈다. 오바마 정부는 회생 결정과 동시에 상상 이상의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양보하지 않으면 모두가 망한다’는 위기감 때문일까. 우선 전미자동차(UAW)가 고통분담에 동의했다. ‘차 한대에 비아그라 1.5달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방만했던 퇴직 근로자에 대한 의료ㆍ복지혜택이 축소됐다. 6년간 파업 자제 선언도 모자라, 신입 직원 임금을 기존 직원의 절반으로 깎는 ‘이중 임금제’도입에도 합의했다. 2007년 시간당 78달러였던 노동비용이 2015년 시간당 54달러까지 낮아졌다. 이 과정에서 GM에서만 근로자 2만여명이 일시 해고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14개 공장은 문을 닫았다.
채권자와 경영진도 책임을 분담했다. 금융기관은 빚을 포기하고 새로 설립된 ‘뉴 GM’의 주식을 받았다. 릭 왜고너 GM 회장은 오바마 정권의 요구에 따라 퇴진했다. 크라이슬러도 경영권이 이탈리아의 피아트(Fiat)로 넘어갔다. 구조조정 작업을 자문했던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는 철저하고 강도 높은 고통분담의 배경에는 일본이 ‘반면교사’(反面敎師)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혈세를 투입해 ‘좀비’기업까지 살려낸 일본 사례를 답습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자동차 수요의 급속한 호조가 맞물리면서 2016년 미국 자동차 산업은 정상궤도에 진입했다. GM(510억달러), 크라이슬러(125억달러)에 투입된 공적자금 중 130억달러가 회수되지 못했지만, 자동차 업계가 살아나면서 34만개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GM과 크라이슬러의 재산세ㆍ법인세까지 감안하면 투입비용을 초과하는 경제적 효과를 얻었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단기적 수익성 회복 보다 미국 업체들이 품질과 미래 경쟁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뀐 데 주목하고 있다. 모비스 미주법인 김영석 차장은 “재무부서가 갖고 있던 납품업체 선정권한을 품질부서로 넘기는 등 크라이슬러가 ‘퀄리티 퍼스트’로 경영 전략을 바꿨다”고 소개했다. JD파워 품질 평가에서 만년 하위권이던 크라이슬러가 2014년 업계 평균을 상회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김기찬 조지워싱턴대 방문교수는 “오바마 정부가 ‘군살 빼기’와 함께 전기차와 무인주행 등 미래기술 분야의 기술개발을 유도한 게 미국 자동차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크게 끌어 올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9년 오바마 행정부는 2015년까지 연간 100만대의 첨단기술 자동차를 보급한다는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김 교수는 “미국 테슬라가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과시하고 GM이 ‘볼트’(전기차 브랜드)를 판매 중인 것도 미국 정부의 선제적인 기술개발 유도 정책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디트로이트 무역관 김 관장도 “포드 역시 관련 기술을 지닌 한국 자동차 부품업체와의 접촉을 늘리는 등 전기차 분야에서 GM에 뒤진 기술력을 만회하기 위해 적극 노력 중”이라고 소개했다. 디트로이트(미시간 주)ㆍ톨레도(오하이오 주)=조철환특파원
미국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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