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인 2116년에 발간될 서양음악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2015년은 한국의 연주가들이 유럽의 주요 콩쿠르를 휩쓴 해였다.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임지영(바이올린, 1995년 생),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의 문지영(피아노, 1995년 생) 그리고 폴란드 쇼팽 콩쿠르의 조성진(피아노, 1994년 생). 한국은 더 이상 클래식음악의 변방이 아니라 새로운 중심국이 되었다.”
올해 2월 조성진이 출연한 콘서트의 티켓은 오픈한지 50분 만에 2,500석이 매진되었고, 피아노 학원들은 너도나도 ‘조성진 피아노학원’이라는 간판을 달 것만 같았다. 언론을 뜨겁게 달구던 조성진의 열풍이 살짝 가라앉은 지금도 국제적 수준의 콩쿠르 입상 소식은 끊임없이 날아오고 있다. 최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장유진과 김봄소리가 각각 일본 센다이 콩쿠르 우승과 캐나다 몬트리올 콩쿠르 입상 소식을 전해왔다.
콩쿠르에 대한 관심과 그 열풍은 최근의 현상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 시작은 오래 전부터였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 피난지 부산에서 첫 선을 보인 ‘아동음악콩쿠르’는 현재 이화경향음악콩쿠르라는 명칭으로 계속되고 있다. 조성진의 스승인 신수정은 1952년 당시 초등 6학년으로 참가했는데 “비가 온 뒤 진흙으로 변한 땅을 밟고 이화여고 가교사인 텐트 속에서 피아노를 쳤다”고 회상했다. 보릿고개가 사라지지도 않았던 1960년대에도 언론은 피아니스트 한동일을 비롯하여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와 정경화 등의 해외 유학과 연주회, 콩쿠르 입상 소식을 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서울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음악과 악기 교육이 조금씩 보편화되면서 음악 교육에 욕심을 내는 학부모들을 향해 ‘천재는 아무 데서나 나오는 것이 아니라’라는 어조의 권고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 분석도 다양하다. 한국 엄마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는 맹모삼천지교론부터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 시장이 점점 축소되는 가운데 아시아와 한국이 그 대안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주장, 또한 연주 기술 위주의 교육에서 창의성을 중시하는 개념 교육 위주로 바뀌고 있는 유럽 교육 풍토와 달리 한국은 여전히 기교 전수에 힘쓰기 때문에 기교에 능한 입상자가 나온다는 주장 등 분분하다. 일명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 1995년 1차 예선 진출자 중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는데, 2011년에는 22명이나 되자 벨기에 국영방송은 전문가들을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 클래식의 수수께끼’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여기서도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을 제일로 꼽았다.
콩쿠르에는 젊은 음악가들이 꿈꾸는 모든 것들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상으로 주어지는 상금부터 현악 연주자들의 경우 몇 십 억짜리 악기를 무상으로 대여 받을 수 있는 특전이 따라 붙는다. 주최국 음악시장을 중심으로 연주와 음반 제작 계약이 성사되기도 한다. 남성 연주자의 경우 군복무 면제를 위해 출전하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한 콩쿠르는 현재 기준으로 모두 29개이다. 국내에도 3개가 존재한다.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개교는 콩쿠르 열풍에 제대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베이비붐 세대는 높은 교육열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외 유학을 마치고 197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안착했다. 이후 1980년대에 국내 음악교육에 대한 체질 개선과 각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전문적인 음악기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 결과 1993년 국립예술교육기관인 한예종이 문을 열었다. 사실 그 전까지 국내 음악대학이란 해외 유학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 거처로 취급되었다. 콩쿠르의 별을 따오는 것도 클래식 본국으로의 유학 뒤에 얻는 결과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한예종은 그 과정을 단축시켜 ‘해외 유학 없이 세계적인 음악가를 배출하겠다’는 포부와 그 입증 장치로 국제콩쿠르를 활용했다. 언론도 촉을 세우고 이에 주목했다. 초대총장 이강숙은 한 인터뷰에서 “그때는 해외 콩쿠르 성과야말로 학교 예산을 끌어올 방편이었다”라고 말했다. 콩쿠르 입상으로 명성을 날린 연주가들 중 한예종이나 이 학교 예비과정 출신이 많은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콩쿠르 경력은 연주자를 대변하는 이력이다. 수상과 동시에 이름이 알려진다. 추상적인 성격이 강한 클래식음악에서 초심의 관객은 이 명성을 통하여 클래식음악에 입문하기도 한다. 역시, 시장에 대한 주목과 확장에는 ‘스타’만한 명약이 없다.
하지만 콩쿠르 입상과 그에 대한 집중 조명이 과도한 서열주의의 반영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창 다양한 곡을 익히고 그 양분을 빨아들여야 할 나이에 콩쿠르 출전곡만 연습하면서 음악가로서 도전 정신과 시야가 좁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일례로 2010년 센다이 콩쿠르와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쥔 후 촉망 받던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2015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출전하겠다 했을 때 사람들은 말렸다고 한다. 연주가로 탄탄대로를 걷던 상태였지만 그녀는 콩쿠르 출전을 통해 유럽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싶었던 것이다. 팬들의 기대와 달리 결과는 4위에 그쳤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국제음악계에 큰 힘을 발휘하는 지휘자 게르기예프의 눈에 띄어 유럽 매니지먼트와 연결되고 있다. 젊은 음악가 특유의 도전 정신이 세간에 의해 거세될 뻔했지만, 클라라 주미 강은 이를 잘 극복한 경우다.
콩쿠르는 입상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콩쿠르에서의 화룡정점 이후에도 예술가로 무르익는 과정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슬럼프와 마주치기도 한다. 그래서 조성진 같은 스타의 등장에 너도 나도 환호하며 열풍을 만들기보다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 응원해야 한다. 국제 콩쿠르에서 수많은 한국 음악가들이 입상했지만 세간의 ‘반짝 관심’과 그 이후 ‘무관심’으로 사라져간 천재들이 더 많다는 것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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