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대 출신 영화배우들은 공통점을 지녔다. 외모는 출중하지 않으나 연기는 빼어나다. 남다르지 않은 얼굴로 남다른 연기를 하며 충무로에 진출한 연극배우는 두 길 중 하나를 걷게 된다. 영화 입문 초창기부터 주연 또는 주조연을 맡거나 조연 전문 감초배우의 길을 간다. 최민식 송강호 김윤석 설경구 등이 관객들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연기로 빠르게 주연 자리를 차지한 배우들이다. 반면 오달수 윤제문 김원해 등은 조연 전문으로 자리잡고 간혹 주연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대에서 연기를 조련한 조진웅은 어느 쪽에 속할까. 최민식과 오달수 등 여러 연극계 출신 선배들과는 달리 그는 제3의 길을 가고 있다. 단역과 오랜 조연 생활을 거친 점은 오달수 윤제문과 비슷하나 주연으로 단단히 자리잡은 점은 최민식 송강호 등을 닮았다. 오달수 같으면서도 송강호 같고 윤제문과 엇비슷하면서도 최민식 등을 연상시키는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흔하디 흔했던 변두리 배우
조진웅의 시작은 미약했다. 충무로 생활은 단역으로 출발했다.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서 고교 불량서클 패거리로, ‘야수’(2005)에서는 조직폭력배로 모습을 비쳤다. 그의 두툼한 덩치와 험한 얼굴을 활용한 배역들이었다. 신하균과 원빈이 형제로 등장했던 ‘우리 형’(2004)에서도 지적 장애가 있는 동네 청년 두식으로 나왔다. ‘비열한 거리’(2006)에서 그의 역할은 조직원이었다. 눈에 띄는 외모가 아닌데다, 강렬한 연기를 선보일 기회가 없던 그는 흔하디 흔한 변두리 배우로 살아갈 운명이었다. ‘강적’(2006)과 ‘폭력서클’(2006) ‘마이 뉴 파트너’(2007) ‘GP506’(2007) ‘달콤한 거짓말’(2008)에서 비중을 점차 키웠으나 스크린 중심에 서기에는 아직 어려워 보였다.
전환점은 충무로 밖에서 마련됐다.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2009)에서 브루터스 리를 연기하며 매력을 발산했다. 소탈한 성격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역할이었는데 조진웅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 감초배우로서 자리잡았고, 이후 충무로 활동도 탄력을 받았다. ‘국가대표’(2009)에 스키점프 해설자로 짧게 등장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치며 이름을 확실히 알렸다.
하지만 그의 자리는 여전히 중심인물 주변이었다. ‘베스트셀러’(2010)에서는 소설가 희수(엄정화) 주변을 맴도는 미스터리한 인물 찬식을 연기했다. ‘글러브’(2011)로 주연 수식을 얻었으나 사고뭉치 야구선수 김상남(정재영)의 매니저 찰스 역할로 조연에 가까웠다. ‘고지전’(2011)에서도 ‘퍼펙트게임’(2011)에서도 그는 극을 주도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조연으로 출연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는 ‘솔약국집 아들들’ 못지않은 발판이 됐다. 1980년대 부산 유흥가에 기생하던 조폭 두목 판호를 연기하며 그는 영화계 주류로 떠올랐다.
흔치 않은 덩치 큰 연기파
‘범죄와의 전쟁’을 보면 조진웅이 여우 같은 곰이라는 생각이 든다. 덩치가 크면 두뇌 회전 속도는 느릴 것이라는 선입견은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무식해서 용감한 듯한 판호는 조진웅과 비슷하다. 판호는 외모와 달리 판을 제대로 읽으며 약삭빠르게 움직인다. 판호 캐릭터는 ‘끝까지 간다’에서 변주된다. 경찰이면서도 범죄조직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창민도 명석한 머리로 수를 파악하고 조밀한 계산을 한 뒤 움직이는 인물이다. 위압감을 주는 큰 몸과 빠른 두뇌 회전이 결합되며 창민은 악당 중에 악당으로 표현된다.
큰 덩치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모습은 꽤 큰 파괴력을 지니는데 이는 배우 조진웅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과도 맥을 같이 한다. ‘군도: 민란의 시대’(2014)에서 그는 의적 무리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태기를 연기했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에선 순박하면서도 공격적인 모순된 이미지를 활용했고, ‘명량’(2014)은 그의 우직한 외면을 소비했다. ‘아가씨’(2016)와 개봉을 앞둔 ‘사냥’은 그의 듬직한 이미지에 감춰진 비열함을 끄집어냈다.
판호나 창민, 태기처럼 조진웅의 연기도 지능형에 가까워 보인다. 오랜 연극배우 생활이 그 밑바탕이 됐을 터이다. 조진웅은 부산 경성대 재학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서 활약했다. “활자가 아닌 몸으로 연극 사조나 고전 희곡을 이해했다”고 밝힐 정도로 현장 체질이었다. 일단 그의 몸이 무기가 됐다. 키 180㎝가 넘는 배우가 부산에 그리 많지 않은 시절이라 덩치 큰 역할은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연극 덕분에 어떤 연기가 정답이라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어떤 캐릭터도 관대하게 받아들인 연극 활동이 좋은 자양분이 됐다. 무대 출신이 아닌 배우를 배척하진 않지만 연극을 거친 배우라면 (실력에 대한) 별 의문 없이 다가갈 수 있어 좋다.”(2014년 5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중)
연기뿐 아니라 무대 연출을 했던 경험도 꽤 큰 자산이다. 연극 연출을 하면서 이야기를 조망하는 능력을 길렀고, 자신의 역할에만 매몰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감독과 소통하고 동료 배우들과 어우러져 연기 앙상블을 이루는 노하우도 연극 배우 시절 쌓은 셈이다.
연극 연출 경험은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무대를 지휘했던 과거를 지나치게 내세우면 감독들과 갈등을 빚을 수 있고, 동료 배우들의 경계를 살 수도 있다. 영화 연출도 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인류가 선택하지 말아야 할 3대 직업이 있는데 1번이 배우, 2번이 영화감독, 3번이 경찰이다. 배우는 내 직업이라 (3대 범주 안에) 넣은 것이고 경찰은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하드보일드한 삶을 산다. 영화감독들을 많이 만나서 느꼈는데 이게 할 짓이 아니구나 싶더라. 주어진 시간에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게 무척 힘든 일이지 않나. 나처럼 수동적인 사람에게는 형벌이나 마찬가지인 직업이다. 몸도 게을러서 아무래도 난 감독은 못될 것 같다. 술자리는 굉장히 부지런한데… 주량? 소주 한두 병 정도? 항상 맥주로 마무리한다(웃음).”
아무리 꿈이 있고 야망이 있어도 본업에 충실한 모습을 보일 때 주변의 좋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역시나 조진웅은 여우 같은 곰을 닮은, 영리한 배우다.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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