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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老母의 소박한 삶을 오롯이 담아내다

입력
2016.06.2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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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老母의 소박한 삶을 오롯이 담아내다

‘100세 시대’라는 희망차고도 두려운 단어가 고령자 주거에 대한 이 사회의 관심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더불어 노인에게 적합한 주택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실내 조명은 노랑, 주황 계통의 밝은 색으로, 약해지는 시력을 감안해 조도는 일반 주택의 2배 이상으로, 누워서도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창문의 위치는 낮게, 악력이 약해질 때를 대비해 문 손잡이는 둥근 것 대신 막대형으로.

전문가들이 만든 이 같은 기준이 노인 주택 설계 시 귀 기울여야 할 사항임이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원론에 불과하다. 요양시설을 지을 때의 주의사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준들은 노인의 특성을 신체 기능 약화로만 바라보는 듯 해 아쉬움이 남는다.

2월 말 충남 아산시 봉재리에 감색 지붕과 미색 외벽이 차분하게 조화를 이루는 작은집이 들어섰다. 다섯 남매가 70대 노모에게 지어드린 봉재리 주택은, 노인의 삶과 그를 담는 집에 대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봉재리 주택은 효도의 현장에 어김 없이 등장하는 어머니의 손사래로 시작됐다. “곧 떠날 사람한테 무슨 새 집이냐.” 정 할머니는 40년 된 집을 허물고 새로 지어드리겠다는 자식들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과거 정 할머니가 살던 집은 사별한 남편이 직접 지은 것이다. 목수였던 남편은 방 세 개가 딸린 벽돌집을 지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없이 개량을 반복하면서 다소 독특한 구조가 됐다. 장남이 결혼했을 때는 며느리가 쓰기 편해야 한다며 화장실을 웬만한 안방 크기만큼 확장했고, 물건이 갑자기 늘었을 때는 샌드위치 패널로 임시 창고를 만들기도 했다.

가족의 역사가 구석구석 묻어 있는 집이지만 자식들이 분가하고 남편까지 떠나자 할머니 홀로 살기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집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고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 쥐들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지경이었다.

다섯 남매가 힘을 모으니 1억원 가량의 돈이 모였다. 자식들의 애를 태우던 할머니의 손사래는 유럽에 파견 근무 중인 막내 아들이 “어머니 집 지어 드리려고 해외까지 나가 돈 버는 것”이라고 말한 뒤에야 슬그머니 거두어졌다.

설계는 건축사사무소53427의 고기웅 소장이 맡았다. 그는 2007년 설계한 주택 해우재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한국화장실협회 초대회장인 고 심재덕 씨를 위해 지은 해우재는 변기 모양을 본 딴 독특한 외관으로 방문자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해우재는 심 회장 사후 문화공간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실험적인 주택으로 이름을 알린 건축가에게 할머니의 시골집 설계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는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자녀들이 힘을 합쳐 어머니의 집을 지어드린다는 취지도 좋고, 노인을 위한 작은집이라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처음에 건축주가 제안한 집은 50㎡(약 15평) 남짓한 크기였다. 15평짜리 집을 짓는 데 1억원은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결코 넉넉하지도 않은 금액이다. 쓸모 없는 공간들을 잘라내고 꼭 필요한 곳만을 남기는 작업이 선행돼야 했다.

고 소장은 방 하나에 거실 겸 주방으로 단출하게 공간을 짠 뒤 박공지붕(책을 거꾸로 엎어 놓은 형태의 삼각지붕) 아래 남는 공간을 이용해 다락을 하나 만들었다. “자제분들이 번갈아 찾아 오시는 데다가 딸린 식구들도 있어 잘 곳이 필요했거든요. 가끔 사용하는 손님방을 위해 집 크기를 늘리거나 2층을 만드는 건 낭비인 것 같아 지붕을 약간 높인 뒤 다락방을 만들었습니다. 주방과 거실 중 주방은 굳이 천장이 높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위에 다락을 조성했죠.”

건축가는 다락 때문에 건물 높이 자체가 높아지는 걸 막기 위해 삼각지붕의 꼭지점을 집 중앙이 아닌 다락이 있는 쪽으로 치우쳐 잡았다. 한쪽은 길고 다른 한 쪽은 짧은 비대칭 지붕이 탄생한 이유다. 높이를 최소화해 건축비를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단순한 외관에 묘한 조형미가 더해지는 효과를 얻었다.

서너 명이 눕기에 충분한 다락에는 삼각지붕의 기운 벽을 따라 제법 큰 천창을 냈다. 밤이 되면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별빛이 할머니 집에 놀러 온 손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지도 모르겠다.

노인의 바깥활동을 위해 두 채로 나뉜 집

바깥에서 본 봉재리 주택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특정 위치에서 보면 다소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마치 두 채의 집을 겹쳐 놓은 듯한 모습이 그것이다.

고 소장은 봉재리 주택을 설계하기 전 아산으로 내려가 정 할머니의 사는 모습을 관찰했다. 정 할머니는 7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했다. 앞마당에 심은 배추와 파, 마늘을 손질하는가 하면 어느새 뒷마당으로 가서 장독대를 살피는 식이었다. 딱히 먹을 사람도 없는데 꾸준히 텃밭을 일구는 정 할머니의 뒷모습은, 노동의 습관이 팔?다리에 박혀 온종일 몸을 놀려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앞마당과 뒷마당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기로 했다. “봄?가을엔 집주인이 실내보다 마당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같았어요. 앞마당에서 뒷마당으로 이동할 때 집을 빙 돌아 가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는 동선을 구상했습니다.”

고 소장은 안방과 거실을 두 채로 나눈 뒤 좁은 복도로 연결했다. 공간 구획이 복잡해질수록 건축비가 올라갈 수 밖에 없지만 마당이 집주인의 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필요한 투자라고 판단했다. 좁은 복도의 양쪽으로는 미닫이 식의 유리문을 설치했다. 집 정면의 유리문을 열면 한 걸음에 복도를 지나쳐 바로 뒷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다.

앞마당 쪽에는 넓은 데크를 설치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널고 말리는 어머니들의 습관을 수용하기 위한 공간이다. 걸터앉기 좋은 높이라 텃밭에서 일한 뒤 땀을 식히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건축가는 “툇마루의 기능도 있지만 대청마루의 개념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혼자 생활하기에 집이 좁지는 않지만 절대적인 규모가 작으니 시각적으로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정면에 설치된 유리문을 열면 거실이 데크까지 확장돼 보이는 효과를 노렸어요. 대청마루가 실내?외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던 것처럼요.”

각종 의례와 접객, 낮잠까지 다양한 활동을 소화하는 대청마루처럼 데크의 활용도 또한 풍부하다. 평소엔 고추와 나물을 널어 말리는 노동의 공간으로 쓰이다가 유리문을 활짝 열면 그대로 야외 거실이 되기도 한다. 기약 없는 방문이 무례로 여겨지지 않는 봉재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 역할도 하고 있다. 말 없는 이웃들은 별다른 기척도 없이 데크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어간다. 여남은 명이 둘러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어 여름에는 가족 모임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봉재리 주택에는 정 할머니 외에 상주객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할머니가 40년 간 모은 방대한 살림살이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천성 때문에 집에는 친척이 주고 간 소주잔부터 소쿠리, 채반, 들통, 저울, 공구, 100년 넘은 괘종시계까지 없는 것이 없다. 자식들의 핀잔 섞인 설득을 견디다 못해 새 집을 지으면서 많이 버렸지만 꼭꼭 감추고 안 버린 물건들이 지금도 문짝 9개짜리 부엌장을 꽉 채우고 있다.

건축가는 주방에 작은 창고를 하나 만든 데 이어 뒷마당 쪽에도 창고를 두 개 만들었다. 안방 채의 뒷부분을 활용해 만든 창고에는 정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살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도무지 쓰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5㎏짜리 아날로그 저울을 콕 집어 “왜 안 버리시느냐” 물었더니 “다 쓸 데가 있다”는 확신에 찬 답변이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남는 매실액을 가져가라며 서둘러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는 모습에서 누군가가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하다.

특이한 공간 구조와 인상적인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봉재리 주택의 미덕은 오래된 시골마을의 어떤 풍경도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흰색보다 침착한 느낌의 미색 외벽과 존재감을 숨긴 듯한 감색 지붕의 조화는 노후한 농가주택과 폐창고 사이에 무던하게 녹아 드는 친화력을 발휘한다.

고 소장은 이 집을 ‘최소의 집이자 최대의 집’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지은 집 중 예산도, 규모도 가장 작았지만 그것 때문에 포기한 건 하나도 없어요. 거주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소의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면 그것이 최대의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에게 손짓하는 대청마루, 자녀들의 방문을 반기는 다락방, 야외활동을 권장하는 앞마당과 뒷마당, 집주인의 고집을 존중하는 여러 개의 창고. 봉재리 주택은 언젠가는 모두 노인이 될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인정하고 위로하고 활성화시키는 집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봉재리주택 건축개요

●대지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봉재리 ● 대지면적 331.00㎡ ● 건물규모 지상 2층 ● 건축면적 61.48㎡ ● 연면적 62.82㎡ ● 건폐율 18.57% ● 용적률 18.98% ● 최고높이 4.868m ● 구조재 목재 ● 지붕재 THK1.2 칼라강판 마감 ● 단열재 THK140 압출법보온판(특호) ● 창호재 시스템창호 ● 외장재 스터코(STUCCO) ● 내장재 석고보드 위 도매마감 ● 설계자 건축사사무소 53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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