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6월 29일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6ㆍ29 (민주화)선언. 그 선언으로 현행 헌법이 탄생했다.
그 해 1월 14일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숨졌고, 학생ㆍ시민들의 ‘살인정권 퇴진’과 직선제 개헌 요구가 빗발쳤다.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 연장을 꾀하던 임기 말 대통령 전두환은 입장을 선회, 4월 13일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5공화국 헌법(8차 개헌)대로 간선 7년 단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였다.
김대중 김영삼은 내각제 개헌에 동조하던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5.1)했고, 재야와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5.27)를 만들었다. 대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건 6월 9일이었고, 국민운동본부의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과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열린 건 6월 10일이었다(노태우도 그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그렇게 6ㆍ10 항쟁이 시작됐다. 연일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고,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7대 도시 100만여 명이 참가했다.
위수령으로 군 투입을 저울질하던 전두환 신군부가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 것은, 미국의 압박과 올림픽이 임박한 까닭도 있었지만 직선제 하의 야권 분열 전망도 계산에 있었을 것이다. 선언의 주요 내용에는 선거법 개정과 언론자유, 기본권 강화, 지방자치ㆍ교육자치, 정당활동 보장과 더불어 DJ 사면 복권이 포함됐다.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12월 16일 노태우는 36.6%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야권 분열과 선거 패배는 수많은 후유증을 낳았고, 유신 이후 이어져온 영남패권을 또렷하게 했다. 90년 김영삼(민주당) 김종필(공화당)과 민정당의 3당 합당으로 거대 야당 민자당이 탄생했고, DJ의 평민당은 호남 중심 소수 유일야당이 됐고, 민중당 등 진보정당은 발 붙일 자리를 잃었다. 협애화한 정당 정치는 한국 정치 성장을 억누르는 멍에가 됐다.
헌법으로 열린 합법 공간은 시민ㆍ노동운동의 터전이 됐고, 한계 속에서나마 자유와 자율 자치의 시대가 시작됐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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