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들은 창녀들 마냥….’ 래퍼 아이언이 지난 30일 낸 신곡 ‘시스템’ 가사의 일부다. 가수들은 졸지에 ‘PD 앞에 한 줄로 서 눈웃음 치며’ 뜨기 위해 몸을 파는 여성으로 전락했다. 사람은 역시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아이언은 2014년 Mnet ‘쇼미더머니3’에서 심사위원 앞에 한 줄로 서 랩을 하며 얼굴을 알렸다. 주목 받고 싶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간 래퍼가 ‘PD 앞에 한 줄로 선’ 가수들을 ‘창녀’ 취급하면서 비아냥거리는 게 아이러니하다.
노래가 흐를수록 불편함도 커진다. 아이언은 곡 후반 ‘허나 떨에 대한 생각까지는 안 바뀌어’라고 당당하게 랩을 쏟아낸다. ‘떨’은 대마초를 뜻하는 속어다. 아이언은 지난 4월 대마초 흡연(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경찰에 입건된 바 있는데, 가사를 보면 대마초 흡연을 후회하진 않는다는 것처럼 들린다. 대마초를 피워 사회의 시스템을 일탈한 그는 연예계 시스템을 ‘막가파’ 식으로 비난하는 ‘시스템’을 냈다. 다시 아이러니란 말이 떠오른다. 법을 무시하고 대마초를 입에 댄 래퍼의 기백은 어디로 갔을까. ‘시스템의 노예’라며 피해자처럼 구는 것도 앞, 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곡 후반으로 갈수록 도를 넘는 선정적인 비방을 듣다 보니 ‘욕 받이’가 된 기분 마저 든다.
아이언의 ‘시스템’을 접하며 더 씁쓸했던 건 힙합계의 시스템이었다. 아이언은 대마초 흡연 입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지 불과 석 달 만에 신곡을 냈다. 힙합계에선 사고 친 래퍼들이 자숙 기간 없이 곡을 내는 게 일상이 된 분위기다. 래퍼 이센스는 지난해 7월22일 대마초 흡연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이틀 후에 ‘비행’이란 노래를 냈다. 한 달이 지난 8월엔 ‘디 애닉노트’란 앨범까지 냈다. 마약을 투약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래퍼 범키도 지난해 1월 2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뒤 같은 달 ‘유턴’이란 정규 앨범을 냈다.
도박이나 음주 운전, 마약 등의 범죄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고 나면 사과를 한 뒤 자숙의 기간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불법도박으로 물의를 빚은 방송인 이수근과 탁재훈(징역 6월·집행유예 1년)은 각각 3년과 2년 여 동안 방송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걸그룹 2NE1의 멤버인 박봄은 미국에서 화물 항공편을 통해 향정신성의약품 암페타민(일명 히로뽕)을 밀반입하려다 2014년 7월 적발돼 아직까지 복귀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일부 래퍼들의 신곡 발표 시기는 너무 빠른 셈이다. 배우나 개그맨 혹은 아이돌 등 다른 연예인들에게 작동하는 ‘자숙의 기간’이 힙합시장에선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물의를 빚은 래퍼들의 자숙 기간이 너무 짧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왜 힙합시장에선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뒤 얼마 되지 않아 음원 공개와 옥중 앨범 발매가 가능한 것일까? 최근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빚은 보이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강인이 이달 앨범을 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류 음악시장에선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 힙합시장에 벌어지고 있는 건 장르적 특성이 지닌 반항 혹은 저항적 이미지를 악용하고 있어서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에 저항이란 이미지를 덧입혀 그들끼리 면죄부를 주고 있는 듯한 인상이 짙다. 한 힙합 레이블 관계자는 “미국에서 래퍼가 수감 중에 앨범을 낸 사례가 꽤 있어 옥중 앨범이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딱히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유명 래퍼 투팍이 지난 1995년 성추행 혐의로 복역했을 때 ‘미 어게인스트 더 월드’란 앨범을 냈고, 빌보드 차트 1위까지 오른 적이 있다. 힙합이란 원래 거칠고 사회 반항적인데, ‘쿨’하지 못하게 음악에 과도하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냐는 일종의 야유다. 하지만, 옥중 앨범 발매가 미국 힙합시장에선 통용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음악인들의 사회적 물의를 바라보는 미국과 한국의 대중 정서가 엄연히 다른데 현지 래퍼들의 행보를 그대로 국내 시장에 적용하는 건 아전인수격 해석일 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에미넴과 스눕 독 등 미국 유명 래퍼들이 여성 비하 랩을 했고, 본토 힙합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한국 래퍼들이 여성 비하 랩을 해도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
엄연한 잘못을 저항이라 생각하는 건 과대 망상일 뿐이다. 잘못을 저항 정신으로 포장하면 사건의 본질은 축소되고, 문제는 반복된다. 일부 래퍼와 힙합 레이블의 도덕적 불감증은 힙합의 저항 정신을 퇴색시켜 장르에 대한 반감만 키울 뿐이다. 아이언의 신곡 발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에 ‘힙합이란 핑계를 내세운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마케팅’(pkw0****), ‘힙합 하는 사람들은 이게 스웨그(Swag·멋짐)라고 생각하나? 잘못해도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당당하게 내 길을 가는 게? 힙합문화를 있는 척, 멋있는 척 하는 문화로 만든 것 같아 씁쓸하네’(drea****)등의 비판이 올라온 걸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아이언과 이센스 등은 공익을 위해 권력의 부조리에 맞서다 입건되거나 감옥살이를 한 투사가 아니다. 곡을 만든 창작자의 범죄와 상관 없이 음악적 질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는 건 지나친 방임이다. 대중을 상대로 음악을 만들었으면(이센스 소속사는 이센스가 수감 중일 때 그의 신곡 공개 소식 등을 보도자료 보냈다.)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범죄와 음원 공개와는 상관 없다는 터무니 없는 스웨그를 버리는 일이 힙합의 대중화를 위해 힙합계 종사자들이 더 고민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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