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한 학점으로 정정 요구 빗발
일부는 재수강 위해 “낮춰달라”
커뮤니티 게시판은 성토글 도배
학교 측은 학점 인플레 막으려
재수강 요건 등 성적 관리 강화
“교수님 너무하세요. 메일로 욕이라도 한 사발 보낼까.”
7월 첫째 주 서울 H대 커뮤니티 게시판은 교수들을 성토하는 학생 글로 도배가 됐다. 1학기 성적 확정을 앞두고 1~5일 성적을 미리 확인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정정기간이 시행된 탓이다. 학생들은 닷새 간 조금이라도 유리한 학점을 받기 위해 교수를 찾아가거나 문의 메일을 보내는 등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밀고 당기기가 실패로 돌아가면 교수들은 졸지에 ‘안읽씹형(메일ㆍ문자를 안 읽고 연락 안 함) 교수’ ‘안알랴줌(마감 임박까지 성적 공개 안 함) 교수’ 등으로 전락해 지탄받기 일쑤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 ‘학점 강박증’에 시달리는 대학생들로 인해 사제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대부분 대학들이 학점 확정 전 정정기간을 통한 구제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대학사회가 과도한 학점 경쟁에 내몰리면서 도를 넘어선 정정 요구로 합리적 성적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제도의 본질이 흐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성적 정정기간 동안 빗발치는 학생들의 문의는 매년 1,7월 반복되는 정기 행사다. 학부생뿐 아니라 학점이 취업과 직결되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경우 학생들은 +,- 하나에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서울 A로스쿨에 재학 중인 김모(33)씨는 8일 “로스쿨은 성적 낮으면 다른 학교에 재입학하는 사례가 나올 정도로 학점 관리에 극도로 민감하다”며 “학생들의 읍소에 골머리를 앓은 교수들이 1등 학생의 답안지를 보여줘 납득시키는 등 학기말마다 성적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진다”고 귀띔했다.
아예 성적을 세탁하려 학점을 깎아달라고 요구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화여대 경영학과 2학년 이모(20)씨는 “학점을 올리고 싶어 B- 받은 과목을 재수강이 가능한 C+로 내려달라는 메일을 보냈는데 교수님이 답변을 하지 않아 포기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전모(27)씨도 “F학점을 받으면 성적증명서에 점수가 기재되지 않아 교수님에게 선물까지 사 들고 수차례 찾아가 F를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서울대에서는 이른바 ‘검은별’로 불리는 독특한 성적공개 방식 때문에 학생들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2014년부터 시행 중인 이 제도는 교수가 학점을 기입하고도 성적을 밝히지 않으려 성적표기란에 검정색 별만 뜨게 하는 방식이다. 정정기간 마감까지 학점을 불문에 부치는 교수들이 많아 정정절차 도입 취지를 무색케 한다는 불만이 비등하다. 서울대 관계자는 “검은별은 성적입력을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였는데 공개를 거부하는 교수들이 늘면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개선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취업 스펙이 다변화하는 추세에도 학생들이 학점에 집착하는 이유는 ‘고학점이 취업의 기본’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서다. 실제로 학점은 여전히 취업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탈 잡코리아가 2013년 기업인사 담당자 316명을 조사한 결과, 채용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격 조건을 묻는 질문에 ‘학점(29.1%)’이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직무 관련 자격증(46.8%)’ 다음으로 많았다.
반면 학교 측은 무분별한 ‘학점 인플레’는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10년간 근무하면서 단순 실수를 제외하고 정정 요구에 응한 적이 없다”며 “학생들의 절박한 심정을 모르지 않지만 특정 학생만 편의를 봐줄 경우 경쟁의 룰을 어겨 전체 학생의 이익을 침해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대학들도 재수강 규정을 강화하는 등 성적 잡음을 줄이기 위한 대안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중앙대는 올해 신입생부터 F학점 외에 재수강을 금지하고, 무제한이었던 재수강 횟수도 재학 중 3회로 바꾸기로 했다. 연세대도 2010년 완화했던 재수강 요건(C+ 이하)을 2013년부터 다시 D+로 낮춰 시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학이 기업의 채용 잣대에 예속돼 오히려 학점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홍성학 전국교수노조 수석부위원장은 “학생들의 지나친 성적정정 요구는 줄세우기가 목적인 상대평가의 폐해”라며 “젊은 인재들의 잠재력과 실력을 길러줄 수 있도록 대학이 먼저 평가의 틀을 바꿔야 기업의 선발 기준도 변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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