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대행사에서 일하는 박은혜(28·가명)씨는 상사인 A 대리 때문에 만성우울에 시달린다. "잘된 건 내 덕, 잘못된 건 네 탓"이 인생 모토인 A대리는 제안서를 쓰거나 프로젝트가 필요할 때마다 회의 소집 후 본인 이름만 적은 기안서를 올리는 상습적 ‘아이디어 스틸러’. 박씨의 분노가 폭발한 건 최근 사장과 팀장이 참석한 평가 보고 프레젠테이션에서였다. A 대리는 "제가 3월 제안한 금번 본사 기획을 통해 고객사 매출이 20% 향상되는 등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었고, 고객사에서도 매우 만족해했다”로 시작해 “B 프로젝트에서는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추후 이를 반영해 더욱 열심히 하겠다"로 마무리했다. 문제가 된 B프로젝트 뒤에는 늘 그렇듯이 괄호 열고 닫고 ‘박은혜씨 제안’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B 프로젝트는 A 대리가 어느 보고서에서 우수 사례로 봤다며 신명 나게 추진했던 프로젝트였건만.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선효진(34·가명) 과장은 매일 아침 책상 앞으로 자신을 호출하는 C 부장의 등살로 하루를 시작한다. 부장의 지적 사항은 주변에서도 듣기 지겨울 정도로 일관됐다. "선 과장, 그렇게 해서 언제 매출 올리겠어. 어?" B 부장은 꾸짖는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도취되기라도 한 듯, 같은 지적 사항을 매일 점점 더 장황하고 호방하게 쏟아댔다. "선 과장, 개발 업무를 해본 지 얼마 안돼서 그러나 본데, 여긴 그렇게 해서 매출이 안 오르는 파트라고!" 동료들은 "어떻게 저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불러내 모욕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라고 혀를 끌끌 찼지만, 그럴수록 B 부장은 유독 선 과장에게만 폭군이 되어갔다.
‘내리갈굼’은 일터괴롭힘이다
직장생활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스트레스를 일터괴롭힘이라는 범죄적 행태와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쉽고 명확한 일이 아니다. 일터괴롭힘쯤 되려면 부장검사의 인격살해적 폭언과 부당한 과중업무로 자살한 김모 검사 사건이나 편집자를 쓰레기장 같은 물류창고로 발령 낸 출판사 자음과모음 경우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게 한국 사회의 평균적 인식이다. 박은혜씨나 선효진 과장이 토로한 고충 정도야 직장생활 하다 보면 다 겪을 수 있는 일로 치부된다.
다음의 체크리스트를 살펴보자. ▦자기보다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 힘들게 하기 ▦매번 꼬투리를 잡거나 책임을 박탈해 유능한 사람 벌주기 ▦능력 있는 사람에게 사소한 일만 부여하기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권한 위임 거부하기 ▦일을 완수하라고 소리 지르기 ▦남들 앞에서나 사적으로나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자신의 업무 방식만 옳다고 고집하기 ▦승진을 방해하고 제자리에 묶어 두기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보고 과도한 업무를 부여하거나 마감을 앞당겨 업무 수행 좌절시키기 ▦다른 사람의 직업적 또는 사교적 능력을 질시해 그들이 무능해 보이도록 만들어 쫓겨나게 하거나 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기. 한국의 직장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이 익숙한 풍경들은 국제노동기구(ILO)가 올해 세 번째 개정판을 내놓은 ‘일터에서의 폭력’ 보고서에서 ‘불링(bullying·집단 따돌림)’의 예시로 열거한 사례들이다.
일터폭력 혹은 일터괴롭힘은 ‘보복적이거나 잔인하거나 악의적이거나 굴욕감을 주는 시도로서, 노동자 개인 또는 집단을 약화시키기 위해 반복되는 공격적인 행동’으로 정의된다. ‘일터에서의 테러리즘’이라고도 불린다. 괴롭힘의 피해자만 고통을 겪는 것도 아니다. 괴롭힘에는 도미노 효과가 있어 피해자와 목격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고통, 두려움, 슬픔 등을 감당해야 한다. 인권활동가 류은숙씨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서선영·이종희 변호사가 공저한 ‘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코난북스 발행)에 따르면, “일터괴롭힘에 대한 적절한 개입과 제동 장치가 없을 경우 괴롭혀도 괜찮다는 허용의 감각이 일터를 지배”하게 된다. 국가경제에 끼치는 손실도 상당하다. ILO 추산에 따르면, 많은 국가들에서 일터괴롭힘으로 발생하는 손실은 국내총생산(GDP)의 1~3.5%에 이른다.
일터괴롭힘은 주로 ‘내리갈굼’이라는 인터넷 은어의 형태로 자행된다. 권력의 위계에 의해 권력 체계의 상부자가 하부자에게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류은숙 활동가는 일터괴롭힘이 상사의 감정은 중요하고 부하의 감정은 하잘것없다는 “감정의 불평등과 약자를 업신여기는 경멸의 학습과정을 통해” 조직적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성격 까칠한 선배가 자꾸 갈군다’는 일터괴롭힘일까, 아닐까. 실적에 대한 평가나 근태 관리, 징계 적용 등은 일터괴롭힘일까, 정당한 경영 관리일까.
일터괴롭힘 대처 현실적으로 소송뿐
판정에는 맥락과 인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캐나다 정부가 펴낸 ‘이것은 괴롭힘인가?-피고용인을 위한 지침’이 참고할 만한데, 관리자가 정상적으로 행사하는 운영권-작업 수행성이나 결근 관리, 과제 할당, 기준 체크, 최고 수준과 종결 시기를 포함한 점진적인 징계 적용 등-은 관리자 권위의 정당한 행사로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기능이 괴롭힘으로 인식할만한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는 주의해야 한다.
일터에서의 갈등 자체도 괴롭힘이 아니다. 하지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으면 괴롭힘으로 전환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갈등과 스트레스가 일절 틈입하지 못하는 무균실일 수는 없겠지만, 지속적인 갈등 상황은 위험하다. 비난과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영혼이 너덜너덜해지는 상태는 자존감 저하와 우울증으로 이어지기 쉽고, 자살과 같은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 부적절한 언사나 퉁명스러운 태도 등의 고립적인 사건이 반복적이 아니라 일회성이라면 괴롭힘이 아니며 쌍방이 받아들인 사회적 관계(공감할 만한 농담이나 상호 작용)나 등을 토닥이는 등 동료 간의 친밀한 제스처도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
화끈하게 술 한잔 하며 회포를 풀거나 직장 내 고충처리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지 않은 해결책이다. 서선영 변호사는 “오히려 고충처리부서에 얘기했다가 가해자에게 비밀 보장이 안 돼서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2차 가해를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현재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가 거의 없어 소송 등 법적 장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소송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면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서 변호사는 책에서 “괴롭힘이 심화될수록 동료와 지지자도 많이 사라지기 때문에 고립된 피해자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과 앙상한 자료 몇 가지만으로 버텨야 한다”며 “가해자로부터 역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증거자료를 기록해 둘 것”을 강조했다. 일자와 시간, 날씨, 상황, 관련 자료 등을 구체적으로 일기 쓰듯 기록해 두는데, ‘과장이 오늘도 모욕적인 말을 했다’가 아닌 ‘밥값은 안 하고 먹기만 하니까 그렇게 살이 찌잖아’처럼 구체적이어야 한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빈번해진 녹음 자료는 나와 상대방의 대화여야지 제3자간 대화일 경우 도청으로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가 된다. 당사자의 대화일지라도 공개하거나 증거로 제출할 때는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부당한 업무 환경이나 모욕적인 글 등은 사진자료로 확보해 두고, 정신 건강에 끼친 해악은 의료전문가의 진단과 기록을 받아두는 것이 좋다. 예컨대 아침마다 출근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우울감으로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을 때 유용한 것은 단순 증언보다 의사의 소견 및 기록이다.
미워하면서 망가지는 건 정작 자신
우리 모두가 성인군자여서 아무도 밉지 않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나에게는 더없이 강렬하고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하지만 이 감정이 괴롭힘이라는 행동으로까지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피해자의 대처법만 강조해서는 일터괴롭힘을 줄일 수 없다. ‘미움의 기술’을 쓴 미국 임상심리학자 제럴드 쇠네볼프는 “세상은 증오로 꽉 차 있지만 제대로 미워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괴적인 방식으로 미워한다”며 “질투부터 혐오, 경멸, 역겨움, 짜증, 분노 등 다양한 층위의 미워하는 감정을 통상적으로 표출할 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 자체를 봉쇄할 수는 없지만,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다루고 미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미움의 감정 뒤에 있는 진짜 이유를 이해하면 미움을 멈추는 게 쉽다고 말한다. 증오는 나 자신의 성격의 지표이기도 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미움이란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도 그들의 문제라기보다 나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는데 나만 그 사람이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벌어진다면, 자기 자신을 더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함으로써 가장 망가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대니얼 골먼 럿거스대 감정지능연구소 디렉터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와 인터뷰에서 미움의 기술 첫 단계로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 행위에 대한 나의 반응에 주목”할 것을 조언했다. 어쩌면 자기 보호본능에서, 대부분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적대와 불신의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직장동료에 대한 험담을 하게 되지만, 증오라는 감정은 전염성이 높다는 점에서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좋다. “당신이 싫어하는 짓을 하고 있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가설에 따라 행동하고, 불평 불만 비난 등 자신의 부정적 감정의 오물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타자의 행동으로부터 괴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감정적 격리를 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를 짜증나게 하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자질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만 초점을 맞춰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이도 저도 다 힘들다면 일단 접촉을 최소화해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의 분노와 짜증이 공정한가 성찰해보는 것도 유용하지만, 대개는 공정하다는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자기본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감정을 은닉하는가 분출하는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활화산처럼 분노가 터지려는 순간이면, 그 감정의 이면에는 나의 문제가 있고, 그것이 미움의 진정한 원인임을 떠올려보자.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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