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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기는 삶의 방식이자 놀이다

입력
2016.07.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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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인 수박, 3D프린터로 뽑은 팬케이크, 페트병에 링거용 고무호스를 달아 만든 콜드브루 머신에 보드카로 추출한 더치커피, 솥에 온도계 달아 만든 수비드 머신(진공 저온 조리기)으로 익힌 쇠고기 스테이크, 보드카에 절인 젤리, 수제 맥주, 회오리 커터로 잘라낸 사과.

10일 대전 어은동의 코워킹스페이스 벌집에서 열린 푸드해킹 파티의 메뉴다. 벌집 안의 작은 공방 ‘무규칙 이종결합공작터 용도변경’을 운영하는 메이커 김성수씨가 손님들을 초대해서 별난 음식을 대접했다. 10여명이 모인 자리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메이커 김성수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대전의 메이커 스페이스 ‘무규칙 이종결합공작터 용도변경’ 작업대에 앉았다. 용도변경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 받는 커뮤니티 공방이다.
메이커 김성수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대전의 메이커 스페이스 ‘무규칙 이종결합공작터 용도변경’ 작업대에 앉았다. 용도변경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 받는 커뮤니티 공방이다.

색다르게 만들어 먹는 재미를 위해 김씨는 커피 머신과 수비드 머신, 3D프린터를 직접 만들었다. 페트병에 고무호스를 연결한 커피머신은 그가 만든 ‘가난한 자를 위한 물건’ 세트 중 하나다. 가난한 자를 위한 에어컨과 공기청정기도 있다. 에어컨은 풍선을 얼려 스티로폼 상자 안에 넣고 선풍기 팬을 돌려 찬 공기를 뽑아낸다. 공기청정기는 스티로폼 상자와 6,000원짜리 차량용 에어컨 필터, 컴퓨터 쿨링팬으로 만들었다. 수비드 머신은 솥 안의 물이 60도를 넘으면 자동으로 전원이 차단됐다가 식으면 다시 켜지는 방식이다. 반죽통을 얹은 3D프린터는 그릴판에 팬케이크를 구웠다. 수박 슬러시는 전동드릴에 꽂은 철사로 수박 속을 갈아서 만들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파티는 즐거웠다.

국내서 가장 오래된 메이커공방 ‘용도변경’ 운영자 김성수씨

“성과 재촉하지 말고 실패를 용인해야”

해킹이라고 하면 흔히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 침입해서 망가뜨리거나 정보를 빼내는 것을 떠올리지만, 본래는 이리저리 헤집어서 다르게 만들기, 용도 변경을 뜻하는 말이다. 해킹은 놀이다. 뭔가를 만드는 사람인 메이커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스스로 터득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지 않고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며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낀다.

메이커스페이스 용도변경의 푸드해킹 파티에 등장한 팬케이크 프린터. 3D프린터로 팬케이크를 뽑아 그릴에 구웠다.
메이커스페이스 용도변경의 푸드해킹 파티에 등장한 팬케이크 프린터. 3D프린터로 팬케이크를 뽑아 그릴에 구웠다.

‘용도변경’은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회원제 자작 커뮤니티 공간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메이커 스페이스이기도 하다. 국내 메이커스페이스의 효시로 2011년 봄 서울 을지로에 생긴 해커스페이스 서울은 사라졌지만, 그 해 여름 문을 연 ‘용도변경’은 건재하고 있다. 망치, 드릴, 톱, 자, 드라이버, 3D프린터, CNC(컴퓨터 수치제어) 공작기계, 각종 전자부품과 전선 등이 책상 가득 널렸다. 사람 하나 앉을 자리밖에 없는 좁은 공간에서 김씨는 뭐든지 뚝딱 고치고 만들어낸다. 3D프린터, CNC 같은 디지털 제작도구, 애완동물과 놀아주는 장난감 로봇인 펫토이봇, 바다에 유출된 기름 확산을 막는 펜스 설치 로봇 등을 만들었다.

그에게 만들기는 본능 같은 것이다. 디자인, 설계, 시제품 제작을 해주는 제품 개발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일과 상관없이 만들고 싶은 것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궁금해서 뜯어보고 재미있어서 만든다. 새로운 시도는 단번에 성공하지 않는다. 메이커는 실패에서 배운다. 김씨는 “만들기보다 중요한 게 실패”라며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돈 되는 거 빨리빨리 만들어내라 하고, 신제품 개발하다 성과가 안 나오면 잘라버리라고 하죠. 남이 만든 것을 베낄 때는 빨리 해내는 게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여러 번 실패하고 원인을 찾아내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배우게 되죠. 진정한 창의력은 거기서 나와요.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필요해요.”

공예와 디지털제조 실험실 ‘릴리쿰’ 의 땡땡이선언

쓸데없는 것의 힘…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

용도변경의 책상 앞 유리창에는 ‘땡땡이선언’이 붙어 있다. 1. 우리는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 2. 우리는 쓸데없는 것의 힘을 안다.

만들기 공동체 릴리쿰의 땡땡이선언. 1.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 2. 우리는 쓸 데 없는 것의 힘을 안다.
만들기 공동체 릴리쿰의 땡땡이선언. 1.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 2. 우리는 쓸 데 없는 것의 힘을 안다.

메이커의 본질을 압축한 이 유쾌한 선언은 서울 연남동에 둥지를 튼 메이커 커뮤니티 ‘릴리쿰’(Reliquum)의 작품이다. 공예와 디지털제조의 창작실험실인 릴리쿰은 라틴어로 ‘나머지’를 뜻한다. 남아 돌아서 없어도 되는, 낙오자를 가리키는 잉여가 어니라 여유를 즐기고 놀이하는 인간과 거기서 오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에너지를 지지하는 모임이다. 이들에게 만들기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의 노동은 왜 힘들기만 할까, 놀이하듯 즐겁게 일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공유하는 20대 청춘 세 명이 모인 것이 2011년. 2013년 공동작업실을 마련하고 땡땡이공작 워크숍을 하고 만든 물건을 팔기도 하면서 꾸려왔다.

릴리쿰이 제주도 바닷가에서 했던 영화 만들기 ‘야매공작’은 허튼 짓의 즐거움과 딴짓의 풍성한 잉여력을 여실히 보여준 프로젝트다. ‘허접 허섭 구멍가게 블록버스터’를 목표로 SF 고전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를 다시 찍었다. 고물상에서 구한 물건으로 만든 우스꽝스럽고 어설픈 소품과 의상에다 직접 연기까지 하는 가짜영화를 위해 영화학도, 철학 전공 대학생, 바리스타, 현지에서 즉석 합류한 여행자까지 힘을 합쳐 1박 2일을 바쳤다. 그건 시간 낭비가 아니라 자신을 재발견하고 표현하는 과정이었다.

호기심 많은 커피점 주인 이희철씨

“메이커는 미래 격변에 대비하는 노아의 방주”

그러고도 먹고 살 수 있을까. 별난 기술놀이 취미에 그치는 건 아닐까. 경기 분당에서 맛 좋기로 소문난 커피점을 운영하는 메이커 이희철씨는 낙관한다. 그는 메이커가 직업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격변하는 미래의 쓰나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노아의 방주”라고 확신한다.

수비드 머신으로 개조하려고 뜯어놓은 전기밥솥을 보여주는 이희철씨. 그가 운영하는 커피점 지하의 작업실은 온갖 만들기 도구와 작업 중인 물건들이 점령하고 있다.
수비드 머신으로 개조하려고 뜯어놓은 전기밥솥을 보여주는 이희철씨. 그가 운영하는 커피점 지하의 작업실은 온갖 만들기 도구와 작업 중인 물건들이 점령하고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미래를 실감케했죠. 지금까지 살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요. 많은 사람들이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기술 발달 속도는 따라가기 힘들 만큼 빨라요. 올라타지 못하면 쓸려나가는 시대에 메이커는 노아의 방주라고 생각합니다. 메이커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문제 해결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카페에서 쓰는 물건 대부분은 손수 만들었다. 진공관앰프와 스피커, 더치커피 머신, 화상회의에 쓸 수 있는 전자액자, 테라스 의자에 씌운 방석, 명함과 메뉴판 등등. 카페 지하에는 그의 주방과 작업실이 있다. 빵과 쿠키, 커피, 맥주를 만든다. 못하는 요리가 없다. 냉장고를 개조한 발효기 등 맥주 제조에 필요한 도구도 직접 만들었다. 커피대회 심판, 한때 벤처 사업가, 목공부터 전자회로, 용접, 컴퓨터까지 두루 능숙한 만능 메이커로서 누구보다 오지랖이 넓다. 호기심 때문에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어릴 때부터 만들기에 몰두하다 보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짓 한다는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메이커라서 행복하다.

현재 그는 전기밥솥을 해킹해 지능형 수비드 머신을 만들고 있다. 다른 사람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과정 전부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만들고 배우고 나누는 메이커의 정신을, 그는 일상에서 즐겁게 실천하고 있다. 글ㆍ사진=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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