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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프 드 구주를 세상에 알린 늦깎이 페미니스트

입력
2016.07.30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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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브누아트 그루는 전간기 파리 부르주아의 억압적 여성교육을 받고 성장해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차별의 성정치에 글과 삶으로 맞선 페미니스트였다. 18세기의 선구자적 페미니스트 구주를 발굴해 소개한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의 소개글에서 그는 "이 멋진 여장부들, 이 용감한 악녀들, 그때까지 아직 이름을 알지 못했던 페미니즘의 열정적인 여전사들은 정의를 돌려받을 자격이 충분했다"고 썼다. 이제 우리가 그를 기억할 차례다. fr.wikikpedia.org
프랑스 작가 브누아트 그루는 전간기 파리 부르주아의 억압적 여성교육을 받고 성장해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차별의 성정치에 글과 삶으로 맞선 페미니스트였다. 18세기의 선구자적 페미니스트 구주를 발굴해 소개한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의 소개글에서 그는 "이 멋진 여장부들, 이 용감한 악녀들, 그때까지 아직 이름을 알지 못했던 페미니즘의 열정적인 여전사들은 정의를 돌려받을 자격이 충분했다"고 썼다. 이제 우리가 그를 기억할 차례다. fr.wikikpedia.org

-52세의 페미니스트 선언

에세이 ‘그녀 뜻대로 되게…’

피임과 낙태 권리 외치며

佛 최초 여성성기절제 고발도

-66세에 쓴 ‘…드 구주가 있었다’

성차별은 인종차별의 변종

18세기 인권선언 위선 고발한

압도적 페미니스트 발굴

“여성의 권리는 항상 위태로워

숱한 여성, 침묵의 베일 뒤에서

하룻밤새 그 과실 잃어버려”

99%의 평민ㆍ노예들이 낸 세금으로 1% 남짓의 성직자ㆍ귀족들이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떵떵거리던 절대왕정기 프랑스에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1748~1793)가 살았다. 그는 희곡과 소설을 쓴 작가였고, 성ㆍ인종 차별에 개인의 이름으로 정치 성명서를 내던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그가 자유ㆍ평등ㆍ박애의 공화주의자들의 이상에 동조해 혁명 대열에 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의 천부인권을 밝힌 1789년 인권선언 1조가 달았던 단서조항 즉 ‘공동이익을 위한 사회적 차별 허용’은 흑인노예만을 겨냥한 게 아니었고, 여성은 평등한 시민이 아니었다. 귀족가문 서출의 여성인 구주는 혁명 2년 뒤인 1791년 ‘왕비에게 헌정하는 여성권리선언’(1791)을 썼다. 제목과 달리, 무너진 바스티유의 폐허 위에 단두대를 놓은 조르주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등 마초 권력에 대한 담대한 도전장이자 89년 인권선언의 위선에 대한 고발장이었다.

그의 ‘선언’ 전문(前文)은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말해보라. 내 성(性)을 억압하는 지상 최고의 권한을 누가 그대에게 주었는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제 10조)고 선언했다.

공포정치의 위세도 그를 억누르진 못했다. 150년 뒤 버틀란드 러셀이 표현했듯 “머리를 계속 달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재빨리 소신을 갈아치운 약삭빠른 비겁자들”과 달리, 그는 피에 굶주린 권력자와 군중을 향해 “비록 죄인들의 피일지라도 잔혹하고 과도하게 흐른 피는 영원히 혁명을 더럽힌다”며 맨몸으로 막아 섰고, ‘왕당파’로 몰려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이후 그는, 말 그대로 까맣게 잊혔다. 수많은 역사가와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닦고 광내던 근대 시민혁명의 단상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작가 브누아트 그루(Benoite Groult)가 저 압도적인 페미니스트를 발굴해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백선희 옮김, 마음산책)라는 선언적 제목을 달아 세상에 알린 건 1986년이었다. 구주가 쓴 정치 문건들을 모으고, 그의 생애를 복원해 소개한 70여 쪽의 글에서 그루는 구주를 “성차별주의가 인종차별주의의 한 변종임을 이해한 최초의 페미니스트”라며 “그(들)가 잊힌 것은 오직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 반항녀들, 이 괴짜들 또는 이 예술가들이 정숙한 여자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제공하고, 미래 세대의 어린 여자들에게 모범이 될 위험이 없도록, 역사가들, 연대기 작가들, 철학자들은 아주 확실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을 역사의 지하 감옥에 집어넣고 우리의 집단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것이다.”

60대 중반의 그루는 어쩌면 “정숙한 여자들에게 나쁜 본보기…”운운하는 저 문장을 쓰면서, 두 해 뒤 발표하게 될 자신의 문제작 ‘Les Vaisseaux du Coeur 심장의 혈관’(1988)에 가해질 비난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이토록 지독한 떨림’(양진성 옮김, 문이당)이란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저 소설은 파리의 인텔리 여성이 10대 말에 알게 된 시골뱃사람과 평생을 두고 육체적 쾌락-“벌거벗은 두 육체의 진실”-에 탐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쾌감을 느끼게 하는 성기를 말할 때도,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들은 새로운 암초에 부딪치게 된다. ‘당신의 음낭은…, (…) 내 음부, 나의 질, 당신의 클리토리스…, 어떻게 하면 우습지 않게 묘사할 수 있을까.(…) 특히 여성의 오르가슴을 묘사하는 부분은 아무리 훌륭한 작가들이 쓴 것이라고 해도 어휘가 빈약하기 짝이 없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걸작과 포르노그래피의 중간쯤에 놓일 각오로 썼다는 그의 소설은 “여성 성 해방의 서사”라는 환호와 함께 “여성 포르노” 혹은 “남근 숭배의 졸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AFP,16.6.21)

시몬 느 보부아르(1908~1986)의 세례를 받은 늦깎이 페미니스트였지만 삶과 작품을 통해 당대 실존주의 페미니즘을 넘어섰고, 페미니즘 단체에 가담해 주도적으로 활동한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앞서 낙태 허용과 FGM(여성 성기 절제) 근절 등을 촉구하며 결혼 등 남성 중심적 제도와 관습의 억압에 맞섰던 브누아트 그루가 6월 20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그림 2브누아트 그루의 1986년 저서의 한국어판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왼쪽)와 72년 펴낸 에세이 'Ainsi soit-elle(그녀 뜻대로 되게 하소서)’ 표지.
그림 2브누아트 그루의 1986년 저서의 한국어판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왼쪽)와 72년 펴낸 에세이 'Ainsi soit-elle(그녀 뜻대로 되게 하소서)’ 표지.

그루는 1920년 1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앙드레 그루는 성공한 인테리어 디자이너였고, 어머니 니콜은 패션 디자이너로 사교계 명사였다. 모더니즘 패션의 선구자로 불리는 폴 푸아레(Paul Poiret)와 장 푸아레가 그루의 외삼촌이었고, 엄마의 절친이었던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이 그루의 대모였다. 그의 파리 집은 장 콕도, 기욤 아폴리네르 등이 드나들던 일종의 살롱이었고, 니콜 역시 꽤나 자유분방한 여성이었던 듯하다. 모든 여성이 “창녀(Snipe)나 숙녀(Lady), 아니면 잔다르크”로 나뉘던 시절, 좋은 교육 받으며 순하게 자라 베일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닐 즈음 파트롱 손에 이끌려 파티에 데뷔, 유능하고 가문 좋은 청년을 만나 결혼하는 게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지고의 삶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니콜은 두 딸 브누아트와 네 살 아래의 플로라에게 한없이 엄하고 극성스러운 엄마였다고 한다. 에바 사토리(Eva Martin Sartori) 등이 편집한 책 ‘French Women Writers’에는, 니콜이 딸의 옷차림서부터 교우관계까지 일일이 감시했고, 피서지에서조차 신문ㆍ잡지를 부모 앞에서 낭독하게 할 정도였다고 쓰여 있다. 어린 브루의 유일한 낙은 방학 때마다 들르던 할머니의 브르타뉴 영지의 숲과 바다였다. 자유로운 숨쉬기. 보트 타기와 낚시, 사이클링, 가드닝은 그의 평생 취미였다.

사실 그 시기 파리의 부르주아 여성 교육이 대체로 그러했다. 브루는 상트 클로틸드(Sainte-clotilde) 학교와 파리 7구 빅토르 뒤리 고교(Lycee Victor Duruy)를 졸업할 때까지, 소르본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전공해 가톨릭계 사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때까지, 부모의 마음에 쏙 드는 딸이었다. 비시 정부 시절, 추운 집에서 먹을 거리를 걱정하면서도 니콜의 최대 관심사는 딸의 배필을 찾아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브루는 남자를 직접 선택했다. 그는 4번 결혼했다. 43년 첫 남편도 이듬해 두 번째 남편도 모두 요절했다. 의대생이던 두 번째 남편(Pierre Heuyer)은 폐결핵으로 8개월 만에 숨졌는데, 브루는 평생 그와 나눈 약혼반지를 끼고 살았다.(liberation.fr, 2016.6.21) 과부가 된 그는 미국 적십자사 일이나 미군들의 파리 생활을 가이드하는 ‘레인보우 클럽’등서 일하며 생활고를 겪었다. 교사 일을 그만두고 프랑스 국영라디오방송국 기자로 취직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거기서 한 저널리스트(Georges de Caunes)를 만나 46년 재혼, 두 딸을 낳고 51년 이혼했다. 그는 아들을 원했고, 바깥일 하는 그루가 못마땅해 노트를 찢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루는 이혼 직후 저널리스트 겸 소설가 폴 기마르(Paul Guimard, 1921~2004)와 재혼, 딸 하나를 낳고 해로했다. 클로드 소테 감독의 영화 ‘즐거운 인생(원제 Les Choses de La Vie)’의 동명의 원작 소설(1967)을 쓴 기마르는 그루에게 청혼하며 “결혼이 나를 가두는 수녀원 같은 것이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삶과,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의외의 것들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루는 “전적으로(Tout a fait, Strongly) 동의한다”고 대답했다.(리베라시옹, 위 기사)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출간한 건 1949년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30대 초의 그루는 훗날 그 무렵을 회고하며 “페미니스트가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앙시엥 레짐’과 결별한 페미니스트였다. 그 동력은, 버지니아 울프도 보부아르도 아닌, 스스로 너무나 소중했던 여성으로서의 자유와 권리에의 갈망이었다.

도로시 파커의 시 등을 번역하던 그는 60년대부터 동생과 함께, 70년대부터는 혼자, 소설과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62년 발표한 ‘Le Journal a quatre mains(Journal written with four hands)’등은 전쟁 중 여성들이 겪던 일과 생각을 서간체 형식으로 동생과 번갈아 쓴 작품이고, 불어로 ‘아멘(amen)’을 뜻하는 관용어 ‘ainsi soit-il’의 대명사를 그녀(elle)로 바꾼 그의 72년 에세이 ‘Ainsi soit-elle(그녀 뜻대로 되게 하소서)’는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제2의 ‘제2의 성’이었다. 그리고 52세 브루의 힘찬 페미니스트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의 주제도 가족과 결혼, 모녀ㆍ자매ㆍ친구 등 여성들간의 관계, 환경 등 여성인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예컨대 ‘Le Journal…’등에서 그는 피임조차 불법이던 시절의 낙태 시술 경험과 위험성 등을 격렬한 어조로 썼고, ‘Il etait deux fois(Twice upon a Time, 1968)’라는 소설 속 엄마는 피임에 실패한 딸에게 낙태를 권하며 “생명에 대한 존중은 그 생명을 낳는 이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돼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림 31988년의 문제작 'Les Vaisseaux du Coeur(심장의 혈관)' 한국어판인 '이토록 지독한 떨림'(왼쪽)과 그가 만들던 페미니스트 잡지 '매거진 F'의 79년 1월호 표지.
그림 31988년의 문제작 'Les Vaisseaux du Coeur(심장의 혈관)' 한국어판인 '이토록 지독한 떨림'(왼쪽)과 그가 만들던 페미니스트 잡지 '매거진 F'의 79년 1월호 표지.

프랑스 의회가 피임을 합법화한 것은 69년이었고, 낙태 허용법안을 통과시킨 건 시몬 베이유가 보건장관이던 1974년 11월이었다. 앞서 71년 4월 보부아르와 마르그리트 뒤라스,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프랑수아즈 사강 등 여성 유명인 343명이 낙태 허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실은 성명서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낙태 경험을 공개하면서 “우리도 법을 어겼으니 처벌하라”고 항의,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1920년 법에 맞섰다. 거기 그루의 이름은 없다. 왜 가담하지 않았는지 설명한 자료도 없다. 그는 모두 6차례 낙태 시술을 받았고, 친구를 도와 직접 낙태 시술을 한 적도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저 성명서의 주장을 앞서 혼자 외쳐왔다고 여겨 사양했을 수도 있고, ‘ainsi…’ 발표 전이라 페미니스트로서 덜 알려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이나 말보다 더, 특히 성 해방의 측면에서 급진적이었던 그의 삶이 당시 페미니즘 진영으로선 불편했을지 모른다. 한 해 뒤 발표한 ‘Ainsi…’에서 그는 “목청껏 고함은 지르되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분노하지는 말라”며 훈수를 두는 그가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Ainsi…’를 통해 프랑스에선 사실상 최초로 여성 성기절제(FGM)의 문제를 고발했고, 여성의 성기는 추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며, 남성에 의해 교정(rectify) 돼야 할 무엇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여성인 걸 은근히 불만스러워했던 보부아르와 달리 그는 여성으로서의 자신과 제 육체를 자랑스러워했고, 그 당당함으로 페미니즘의 대의에 동참하고자 했던 전 세대 남자들- 혁명기의 콩도르세와 자유주의자 스튜어트 밀, 사회주의자 생시몽, 푸리에 등-을 토닥이기도 했다.(책 ‘Le Feminisme au masculin’) 잡지’마리끌레르’ 가문의 일원인 장 클로드 셰르방 슈라이버(Jean-Claude Servan-Schreiberㆍ1918~)와 페미니스트 잡지 ‘매거진 F’(1978~1980)를 발간했고, 미테랑 정부 시절인 84~86년 ‘직업ㆍ용어 여성명사화 위원회’ 의장을 맡아, 남성명사로만 존재하던 의사 작가 변호사 조각가 등의 여성형을 만들었다. 그는 사회당원이었고, 남편은 미테랑의 선거캠프를 이끈 이력이 있었다.

2000년 ‘Ainsi…’ 개정판 서문에 그는 “성평등의 역사는 퇴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은 이들이 있다면, 나는 여성의 권리만큼 위태로운 것도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알제리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등, 자유의 첫 과실을 맛본 숱한 여성들이 침묵의 베일 뒤에서 하룻밤 사이에 그 과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썼다.(huffingtonpost.fr, 16.06.21) 97년 쓰고 2008년 개정판을 낸 자서전 ‘Mon Evasion(My Escape)’에서 그는 “자유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고통스럽게 배워야 할 무엇이다. 나는 내가 받은 교육이 주도면밀하게 감추었던 롤 모델, 다른 여성이 필요했다”고 썼다.(NYT, 16.6.21) 그게 울프였고, 보부아르였고, 누구보다 먼저 올랭프 드 구주였다.

그는 90대에도 멋진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사이클링과 낚시를 즐겼다. 저널리스트 콜레트 메나주(Colette Mesnage)와의 대담(‘노년예찬’심영아 옮김, 정은문고)에서 그는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는 말- “늙는 게 비극이 아니라 늙어도 마음은 여전히 젊다는 게 비극”-을 인용하며, 자기도 2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멋진 남자를 보면 속으로 ‘흠, 저 남자는 예전 같았으면 한번 사귀어볼 만하겠군!’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가 나이 든 여자를 쳐다보는 일은 절대로 없을걸요. 남녀 관계에서는 아직도 이런 부당함이 남아 있어요.” 이런 말도 했다. “속옷회사들은 정말 바보 같아요. 우리가 얼마나 큰 잠재적 고객층인지 모르나 봐요. 끈팬티는 싫지만 큐빅 글씨가 박힌 팬티 정도는 입고 싶은데… 지금 제가 찾을 수 있는 팬티는 수녀나 입을 만한 것뿐이에요.(…) 제 어머니는 20세기 초반 파리 패션업계를 주름잡았던 폴 푸아레의 누이로 양장점을 운영했는데 그땐 모델이 대부분 40대였습니다. 아주 아름다웠어요.(…) 지금은 오래된 영국식 양장점조차 새파란 사춘기 소년 소녀를 모델로 씁니다.” 70대 이후부터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한 모임(ADMD)’회원이 돼 존엄사 합법화 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는 2009년 오시피에 공로훈장(2009)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2010)을 탔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도 제작됐다.

권력자로서의 남성이 아닌 연인으로서의 남자를 사랑했던 그는, 자서전에 썼듯이 “압제자가 당신의 연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먹고 살 돈의 주공급원일 때, 여성의 자유란 복잡하고 풀기 힘든 숙제가 되기도 한다”고 썼고, 만일 구주가 돌아온다면 오늘의 페미니스트에게 어떤 조언을 할 것 같으냐는 한 인터뷰이의 질문에는 “ ‘결혼하지 마라.(…) 혼자 자유를 누리며 자신의 글(일), 자신이 정말 원하는 바를 써라(일을 하라)’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그 조언을 따르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루는 프랑스 남부 예르의 집 뜰 레몬트리 너머, 보트에 앉아 자유를 꿈꾸던 그 유년의 지중해를 마주한 채, 꿈 속에 숨을 거뒀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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