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손가락 마디마디가 나무옹이처럼 굵어진 양손은 ‘작은 거인’이라는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 지 보여줬다. 지난 4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상대의 도복을 붙잡고 늘어지고, 매트를 짚고 일어나며, 자신의 체중보다 두 배나 무거운 역기를 들어올렸을 괴력의 손. 정보경(25ㆍ안산시청)은 은메달이라는 결과가 못내 아쉬워 이 작은 두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쳤다. 20년 만에 한국 여자 유도 올림픽 결승 진출 쾌거를 이뤘지만 정상을 꿈꾼 작은 거인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국 선수단 204명 중 최단신(153㎝) 정보경이 선수단에 첫 메달을 안겼다. 정보경은 7일(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아레나에서 열린 여자 유도 48㎏급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파울로 파레토(세계랭킹 3위ㆍ정보경 8위)에게 안뒤축후리기로 절반패 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앞선 8강전에서 세계랭킹 1위 몽골의 문크흐바트 우란체체그에 맞서 반칙승을 거두며 파란의 금빛 매치기를 예고했던 정보경은 파레토의 노련한 경기 운영에 결국 빈틈을 내주고 무너졌다. 경기가 끝난 뒤 매트 위에 주저 앉은 정보경은 한참 울음을 토해냈다. 그를 지도해 온 이원희 대표팀 코치가 “잘했다”며 어깨를 두드렸지만 눈 앞에서 놓친 금메달이 못내 아쉬웠다. 도복 소매로 두 눈을 꾹꾹 누른 정보경은 취재진 앞에 서서야 “지금까지 운동한 거 여기서 다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감사 드린다”며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그는 이어 “아쉽지만 이렇게 끝이 났으니 다시 열심히 하겠다”며 굳은 다짐을 덧붙였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터진 눈물이 아니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 서기까지가 얼마나 고된지 알기 때문에 정보경의 아쉬움은 더 컸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 동메달ㆍ단체전 금메달을 따내며 기대주로 성장한 정보경은 올림픽 첫 출전에 은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누렸지만 선수 생활 대부분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이어나갔다.
잦은 부상이 문제였다. 작은 체구에도 괴력을 발휘했던 소녀 정보경은 웅상여중 1학년 시절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유도에 입문했으나 경남체고 2학년 때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1년간 재활에만 매달려야 했다. 경기대 3학년 때는 양 무릎 인대가 끊어져 6개월을 쉬어야 했다. 국가대표는 멀기만 한 꿈이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연습 상대 역할에만 머물렀다.
불운이 겹칠 때마다 정보경이 곱씹은 말은 영화 ‘아저씨’의 명대사다. 정보경은 지난 6월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유도 국가대표팀 미디어데이에서 “내일을 살려고 하는 자는 오늘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 죽는 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훈련에 임하고 있다”며 다짐을 밝혔다.
선수 개인의 아쉬움은 컸지만 정보경이 이번 대회에서 이룬 성과는 값지다. 남자 유도에 가려졌던 한국 여자 유도는 20년 만에 올림픽 결승 무대에 진출했다. 여자 유도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조민선이 66㎏급 금메달을 딴 이후로 4개 대회에서 결승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직전 대회인 런던올림픽에서는 노메달의 수모를 당했다. 정보경의 은메달이 여자 유도 부활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이날 정보경의 고향 경남 양산에서 주민들과 밤샘 응원을 펼친 아버지 정철재(54)씨는 “비록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4년 동안 벼르던 올림픽에 나서 준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를 내는 데 성공한 딸이 대견스럽다”며 감격했다. 어머니 윤옥분(50)씨 역시 “유도를 하면서 몇번의 시련을 묵묵히 이겨낸 보경이가 대견스럽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시상대에 올라서야 활짝 웃은 정보경은 국제 무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도약을 다짐했다. 그는 “(지난해 7월에 열린)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처음으로 1위를 했다. 그 이후 자신감을 가졌다”면서 “8강전에서 (세계랭킹 1위) 문크흐바트 우란체체그에 승리한 뒤 ‘메달을 딸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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