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8월 9일
YH무역 직원 172명이 1979년 8월 9일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3월 사측의 일방적인 폐업 이후 장기 농성을 벌이던 이들이 농성장과 기숙사 수도와 전기마저 끊기자 오갈 데 없어 선택한 장소였다. 총재 김영삼이 그들을 환대했다. 배가 든든해야 힘을 낸다며 비빔밥을 시켜줬고 “정치 생명을 걸고 끝까지 지켜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YH무역은 대한무역진흥공사 뉴욕무역관 부관장을 지낸 장용호가 1966년 문 연 가발수출회사로, 운영 5년 만에 직원 4,000여 명에 수출 순위 15위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한 회사. 대부분 여성이던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노동과 박봉을 견디다 75년 노조를 결성했다.
수출이 둔화하면서 경영 여건이 나빠지던 때였다. 인원감축 휴업 등을 반복하며 회삿돈을 해외로 빼돌리던 사장은 78년 2차 오일쇼크 직후 폐업 공고를 했고, 노조의 회사 정상화 자구노력 협상을 외면했다.
당사 농성 사흘째였던 11일 새벽 2시, 진압이 시작됐다. 경찰 1,000여 명은 마포 당사에 진입, 집기를 파손하고 의원 당직자 농성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폭행하고 연행했다. 노동자 김경숙이 그 과정에 숨졌고, 훗날 민노당 의원을 지낸 최순영 당시 지부장과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등이 구속됐다. 신민당은 18일간 항의농성을 벌였고, 종교계ㆍ학계ㆍ민청협 등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YH사태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유신정권은 직후 신민당 원외 지구당 공작을 벌여 김영삼 총재로 선출한 전당대회 일부 대의원의 자격을 문제 삼아 총재단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했고, 9월 법원이 수용하면서 김영삼의 총재 권한이 정지됐다. 박정희의 사주를 받든 유신정권의 국회는 그 무렵 김영삼의 외신 인터뷰를 문제 삼아 10월 4일 그의 의원직마저 박탈했다.
프레시안이 연재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에는 국회 제명 직전 김재규가 김영삼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뉴욕타임스 회견 내용이 와전됐다’는 한 마디만 기자들에게 슬쩍 흘려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였다. 김영삼은 뿌리쳤고, 제명 당했고,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김영삼은 YH 노동자들을 지켜주진 못했지만, 정치 생명을 걸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시작됐고, 10ㆍ26이 이어졌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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