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생전퇴위 의향을 직접 밝히면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헌법개정 로드맵에 불똥이 튀고 있다. 왕실후계문제로 국민적 관심이 옮겨가면서 정계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방대한 검토가 수반되는 ‘황실전범(皇室典範ㆍ왕위계승 관련법)’개정이 2~3년쯤 장기화될 수 있어 개헌추진 일정과 중복되는 실정이다.
아사히(朝日)신문은 9일 “일왕 발표의 후속조치에 몇 년이 소요될 수 있어 정부 추진정책의 우선순위 재검토가 불가피할지 모른다”는 일본 정부 관계자의 언급을 인용해 개헌작업에 미칠 영향을 지적했다. 정부 일각에선 아키히토 일왕에 특별히 적용하는 특별법을 내년 정기국회까지 만든 뒤에 황실전범을 개정하는 2단계론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왕의 지위와 직결된 퇴위절차를 황실전범 이외의 법률로 정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 쉽지만은 않다.
당장 떠오르는 이슈는 여성 및 모계 일왕 문제다. 장남인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더라도 왕세자를 누구로 할지가 관건이다. 아키히토 일왕의 손자ㆍ손녀 4명 중 나루히토 왕세자의 딸인 아이코(愛子)를 포함해 3명이 여자인 가운데 일왕의 차남 후미히토(文仁) 왕자 아래로 유일한 손자 히사히토(悠仁)가 있을 뿐이다. 황실전범상 아버지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남계남자’(男系男子)만 왕위에 오를 수 있어 각종 암투와 국론분열로 번질 우려가 있는 대목이다.
여왕 승계 문제는 10년전 한때 공론화됐지만 워낙 민감해 보류된바 있다. 2005년 1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자문기구를 통한 11개월의 검토 끝에 ‘ 여성ㆍ여계 일왕도 인정하고 왕위계승은 성별과 관계없이 장자우선으로 하자’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 법제화를 논의하던 2006년 9월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여왕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는 중단됐다.
남계고수 방침의 유지에는 당시 관방 부(副)장관이던 아베가 상당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2012년에도 ‘월간 문예춘추’에 “황실의 역사와 단절된 여계 천황에 명확히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아베 정부가 앞으로도 같은 입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도 영국처럼 여왕이 나오는 게 나쁘지 않다는 여론이 확산되는 추세여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다만 일왕 승계 논란이 아베의 개헌구상에 이롭게 작용할 것이란 정반대 시각도 없지 않다. 왕위계승 문제를 조정하려면 어차피 헌법을 손을 대야 하는 만큼 개헌의 문턱을 자연스럽게 낮출 것이란 이유에서다. 아키히토 일왕의 지난 8일 영상메시지 발표를 앞두고 총리관저와 궁내청이 문구를 사전 조율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도 심상치 않다. 개헌을 추진하는 아베 정권 측이 두 가지 사안을 고려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다. 일본 언론이 인용한 정부관계자에 따르면 궁내청이 제시한 일왕메시지 원안에는 실제 발표보다 생전퇴위에 관한 의지가 더욱 강하게 표현됐다가 조율과정에서 순화됐다고 한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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