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의 회식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폭탄주다. 요즘 뜸하지만 몇 년 전만해도 영화 ‘내부자들’에 나오는 것처럼 맥주잔을 나란히 세운 후 그 위에 양주잔을 올려놓고 차례로 쓰러뜨리는 식의 폭탄주 제조법이 유행했다. 그런데 이렇게 폭탄주를 만들면 어느 잔을 마셔야 가장 덜 취할까?
궁금증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실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 잔의 무게와 평균적인 술의 양 등 변수들을 넣은 후 모의시험(시뮬레이션)을 했다. 실험 결과는 ‘마지막잔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잔이 연거푸 쓰러질 때 마지막 잔에서 바닥에 쏟아지는 양주의 양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실험을 해 본 곳은 3D 솔루션기업 다쏘시스템코리아였다. 이 폭탄주 모의 실험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더 이상 머리 속에서 궁금하게 여기는 가상의 상황이 생각 만으로 그치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제품의 성능이나 효과까지 모의시험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 기술이 바로 요즘 산업계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컴퓨터 응용공학(CAE:Computer Aided Engineering)이다. 이를 활용하면 시제품이나 완제품 생산의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약할 수 있어서 산업혁신을 불러올 핵심 기술로 꼽히고 있다.
컴퓨터 모의시험만으로 시제품 생산을 대체
CAE는 제품의 생산 단계 전반에서 컴퓨터를 활용하는 기술이다. 설계나 효과 검증 등 제품 생산에 필요한 과정에서 모의시험을 자동으로 해주는 기술이다. 산업현장에서 널리 쓰이는 설계 단계의 컴퓨터 활용 기술인 캐드(CADㆍcomputer-aided design) 역시 CAE에 포함된다.
과거의 제품 생산은 컴퓨터(CAD)로 도면을 그린 뒤 시제품을 만들어 물리적 실험을 거쳐 완성품을 제작했다. 하지만 CAE를 적용하면 시제품을 만들지 않아도 돼 생산 기간과 비용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다.
항공 산업에서 CAE가 가장 먼저 활성화된 것도 이런 이유다. 시제품을 만들기 위한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일찌감치 시뮬레이션 기술에 주목한 것이다. 역시 완제품의 덩치가 큰 자동차와 조선도 CAE 기술을 일찍부터 도입했다. 일본 토요타는 CAE를 통해 자동차 개발 기간을 6년에서 12~18개월로 단축했다. 심지어 의료분야에서도 임플란트 제작에 CAE를 활용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통신서비스와 각종 기기 등 정보기술(IT)분야에서도 CAE가 활성화되고 있다. 휴대폰 출시 전에 낙하 테스트를 거쳐 CAE로 대체하는 식이다.
도시개발과 경찰수사 등에도 활용..성장가능성 무한대
하지만 전문가들은 CAE의 활용이 아직 초보 수준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만큼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일본의 시야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2년 26억5,000만달러 수준이었던 CAE시장은 2015년 35억달러, 2018년 41억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다.
그만큼 CAE 적용 범위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제조업 뿐 아니라 도시개발이나 경찰 수사 등에도 CAE 기술을 활용한다. 싱가포르는 향후 수십 년을 내다보고 체계적인 도시 관리를 위해 CAE기술을 적용한 가상 도시 플랫폼 ‘버추얼 싱가포르’를 통해 도시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조영빈 다쏘시스템코리아 대표는 “빅데이터나 사물인터넷(IoT)까지 CAE와 접목되면 엄청난 연계효과(시너지)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의 발전도 성장 원인으로 꼽힌다. 프로그램 자체의 기술과 이를 활용하는 엔지니어들의 경험이 쌓이면서 시뮬레이션과 실제의 차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자동차의 충돌 안정성 시뮬레이션 정확도가 95% 이상에 이르는 등 CAE 적용분야들은 90% 이상 정확도를 보이고 있다. 장천수 앤시스코리아 기술총괄 상무는 “현재 대부분의 산업에서 CAD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CAE 역시 4~5년 안에 대중화 될 것”으로 전망했다.
전문인력 부족으로 성장 한계..정부, CAE 자격증 도입
국내 CAE산업 역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기계산업진흥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CAE 시장 규모는 약 2,140억원으로 전년 대비 16% 성장했다. 2010년 757억원 수준에 비하면 3배 가량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제조업 규모에 비하면 여전히 성장이 더디다는 지적이다. 국내 CAE 시장이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점을 문제로 꼽았다. 장천수 앤시스코리아 상무는 “예를 들어 1,000명 수준의 대기업 연구센터에서 CAD 사용자는 70% 이상이지만 CAE를 다루는 사람은 5% 내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래의 자원을 육성하는 대학교도 현실이 다르지 않다. 문성수 알테어 대표는 “관련 학과인 기계공학, 전기전자, 토목 등 전공학생 가운데 CAE를 공부하는 사람은 100명중 5명 이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CAE 자격증 시험을 도입해 전문인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계산업진흥회는 설계기술분야에서 국내 최초로 CAE 검증사 자격시험을 개설해 다음달 3일 시행 예정이다. 문 대표는 “CAE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야 고급 인력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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