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IY가 내일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가 될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4년 백악관 메이커페어에서 한 이 말은 메이커운동이 제조업 부활의 원동력이라는 선언이다. 새로운 혁신과 발명이 만드는 사람, 메이커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픈소스와 디지털 제작도구 덕분에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시대다. 특히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 중심의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메이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대규모 자본과 설비를 동원한 대량생산방식의 전통적 제조업은 혁신에 굼뜰 수밖에 없다. 미래의 혁신은 개인과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나올 거라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메이커는 만들고 배우고 나눈다. 혼자 외롭게 분투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함께 만든다. 거기서 나오는 창의성이야말로 혁신의 강력한 엔진이다.
제조업의 부활
메이커페어는 메이커들이 만든 것을 갖고 나와 교류하는 축제다. 백악관이 메이커페어를 주최한 배경에는 쇠퇴하는 제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목적이 깔려 있다. 각국 정부가 메이커운동을 지원하는 이유도 같다. 저임 노동의 싸구려 제품을 만들어내던 ‘세계의 공장’ 중국은 정보통신기술(ICT)과 융합한 미래형 제조업 강국으로 변신한다는 목표 아래 메이커운동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 아이디어로 취업보다 창업을 택하는 청년이 더 많고 그들이 시제품을 만들 수 있는 메이커스페이스가 급증하는 가운데 정부가 적극적 지원으로 가속을 붙이고 있다. 중국의 하드웨어 실리콘밸리로 꼽히는 선전의 메이커페어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지난달 22~24일 서울 성수동의 성수메이커스페이스에서는 전통적인 수제화에 ICT 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수제화 해커톤 ‘긱스 온 슈즈’(Geeks on Shoes)가 열렸다. 디자이너, 개발자, 메이커, 마케터, 기획자 등 30여 명이 베테랑 수제화 장인 5명과 팀을 짜서 아이디어를 내고 시제품을 제작했다. 8세 이하 어린이와 치매 노인을 위한 위치 추적 신발, 디자인과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하이힐, 제품 정보와 스토리를 담은 NFC칩 내장형 신발 등 전통 수제화 장인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나왔다.
이 행사를 기획하고 주최한 앱센터는 소프트웨어 융합형 혁신과 창업을 지원하는 비영리 봉사단체다. 김세진 앱센터 센터장은 “한국에서 메이커운동이 소수 개인의 취미활동을 넘어 누구나 즐기는 문화가 되고 나아가 제조업 혁명으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며 “따라서 당장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중요한 건 메이커운동이 지닌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앱센터의 역할은 이를 위해 물꼬를 트고 판을 까는 것”이라며 “혁신의 가능성과 통찰력을 제공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취미에서 창업으로
한국의 메이커운동은 이제 첫발을 뗀 단계라 굵직한 성과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DIY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메이커운동에서 나온 스타 상품이 꽤 있다. 신용카드 모바일 결제 시스템인 스퀘어, 세계 최초의 스마트워치 페블이 대표적이다. 이 제품들의 시제품은 메이커들을 위한 회원제 제작공방 테크숍에서 만들어졌다. 월 150달러 회비만 내면 3D프린터, CNC조각기, 레이저커터 등 테크숍 장비를 사용해 원하는 물건을 제작할 수 있다. 현재 미국 전역에 8곳, 해외에 4곳(협의 중인 2곳 포함)이 있는 테크숍은 스타트업의 요람이자 만드는 사람들의 아지트로 자리잡았다.
테크숍의 한국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N피프틴(N15)은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키우는 엑셀러레이터다. 지난해 3월 법인 설립 후 유망 스타트업 발굴과 해외 진출, 해외 투자 유치에 주력하고 있다. 5월 31일 문을 연 서울시 디지털대장간을 위탁운영 중이고, 자체 테크숍도 만들 계획이다. N15이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와 함께 운영하는 ‘글로벌 하드웨어 유니버시티’ 프로그램의 올해 2기는 40명 선발에 300명이 지원해 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N15의 글로벌 엑셀러레이터팀 강무경 팀장은 “한국의 창업 생태계에서 김연아, 박태환, 박지성 같은 롤모델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재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쉽고 싸게 직접 시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적다”고 설명한다.
제조업에 뛰어들려는 메이커들의 진입 장벽을 낮춰 주는 환경은 오픈소스, 메이커 스페이스, 크라우드 펀딩이다. 제작용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누구나 자유롭게 쓰라고 무료 공개된 것이 많다. 만드는 방법과 설계도는 인터넷에 널려 있다. 3D프린터나 CNC 같은 제작 장비는 메이커 스페이스에서 무료로 또는 싸게 사용할 수 있다. 사용법도 쉽다. 물론 소프트웨어든 장비든 익숙하게 다루려면 많이 써봐야 하지만, 만들면서 배우면 된다.
취미로 재미 삼아 만든 물건이 썩 괜찮아서 본격적으로 양산 판매하고 싶지만 자금이 없는 메이커에게 크라우드 펀딩은 길을 열어준다. 시제품 제작을 앞두고 프로젝트를 공개, 선주문이나 십시일반 소액 후원으로 자금을 모아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미국의 킥스타터, 유럽의 인디고고는 메이커들의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에도 최근 텀블벅, 와디즈 등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성장 중이다. 와디즈의 경우 전체 펀딩 건수의 60%가 메이커 작품이다.
제조 방식의 혁명
미국의 로컬모터스는 3D프린터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다. 2014년 세계 최초의 3D프린팅 전기자동차 스트래티를 내놓아 유명해진 이 회사는 올해 6월 IBM의 인공지능 왓슨을 탑재한 자율주행 12인승 버스 올리를 발표해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로컬모터스는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개인 맞춤형 주문 생산을 한다.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비밀리에 신차를 개발하고 거기에 맞는 생산라인을 만든 다음 대량 생산 판매하는 기존 자동차 제조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개방, 공유, 협력을 모토로 개발 과정을 전부 공개한다. 로컬모터스 홈페이지는 자동차 애호가들이 아이디어와 디자인, 설계 파일을 공유하며 개발에 참여하는 개방형 제작 실험실이다. 직원은 약 100명에 불과하지만 디자이너, 엔지니어, 발명가. 소비자 등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5만 2,000여명의 커뮤니티 회원과 협업해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설립 2년 만인 2009년 첫 제품으로 생산한 오프로드 자동차 랠리파이터도 500여 명이 개발에 참여해 완성한 공동 창작물이다.
디자인은 공모해서 회원 투표로 선정한다. 누구나 원하는 파일을 내려받아 나만의 디자인으로 수정할 수도 있다. 복잡한 대규모 공정을 돌리는 전통적 제조로는 개인 맞춤형 생산이 어려운 반면, 3D프린팅은 생산 라인을 개조할 필요 없이 파일만 수정하면 되므로 시간과 비용이 확 줄어든다. 주문이 들어오면 제작하는 맞춤형 소량 생산이라 재고가 없고 공장이 클 필요도 없다. 현재 가동 중인 미국 내 3개 공장도 초소형이다. 이 같은 마이크로팩토리를 앞으로 10년 안에 전세계 200곳에 만들 계획이다. 한국의 울산과 제주에도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로컬모터스는 미래의 제조업 생산 방식을 보여준다.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중심으로, 중앙집중식 대량생산에서 분산형 개인 맞춤형 생산으로, 특허 등 독점보다 공유와 협력으로, 일단 만들고 보는 그래서 안 팔리면 쓰레기로 남는 생산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만들어 자원을 아끼는 지속가능한 생산으로 중심 축이 이동하는 것이다.
생산방식의 변화는 곧 소비방식의 변화로, 나아가 생활방식과 가치관의 변화로 이어진다. 메이커운동이 제조업 혁신을 넘어 더 거대하고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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