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한국영화나 미국영화를 집중적으로 보는 관객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은 당연히 많지 않다. 가장 흥행이 잘 된 영화가 관객 12만명을 좀 넘었다. 전형적인 예술영화 감독이다. 1년에 2편 꼴로 1,000만 영화가 나오는 요즘 잘해야 10만 관객을 모으는 감독이 무슨 대수냐고 물을 만도 하다.
하지만 다양성영화 시장만 놓고 보면 고레에다 감독은 흥행 보증수표다. 다양성영화로선 호성적이라고 할 5만 관객은 보장한다는 말이 영화수입사들 사이에 나돌 정도다. 아니나다를까. 지난 5월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던 최신작 ‘태풍이 지나가고’는 10일까지 5만8,207명이 찾았다. 만들어진 지 21년 만에 국내에서 늦장 개봉(지난달 7일)한 ‘환상의 빛’(1995)은 1만7,181명이 봤다. 흥행 성적이 대체로 좋지 않은 일본영화들 사이에선 눈부신 성과다. “고레에다 감독은 ‘제2의 이와이 슌지’”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일본영화는 살아남기 힘든 국내 극장가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어떻게 관객들의 마음을 훔쳤을까.
일본 예술영화의 전위
고레에다 감독은 일본영화, 좀 더 세밀히 표현하면 예술영화계의 간판이다.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부터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이미 이름이 높았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 다큐멘터리 감독 오가와 신스케의 뒤를 잇는 걸출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 등 4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일본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탐색하던 그는 일본 영화계의 기대와 달리 장편영화로 방향을 틀었다. ‘환상의 빛’으로 갈채를 받은 뒤 ‘원더풀 라이프’(1998)와 ‘디스턴스’(2001) 등을 내놓으며 장편에서도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2004년에는 ‘아무도 모른다’로 14세 소년 야기라 유야에게 칸영화제 역대 최연소 최우수남자배우상을 안겨줬다. ‘아무도 모른다’는 국내에서만 3만4,515명의 관객을 모으며 고레에다의 이름을 영화팬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 네 남매의 비참한 삶이 오래도록 가슴을 아리게 하는 영화였다.
일본의 전설적인 실화 ‘주신구라’ 사건을 토대로 코미디와 휴머니티를 발휘한 시대극 ‘하나’(2007)는 고레에다의 이질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배두나가 사람으로 변하는 성인용 인형을 연기한 ‘공기인형’으로 자신의 색깔’을 되찾은 고레에다 감독은 이후 ‘걸어도 걸어도’(2009)를 발표하며 열성 팬들의 지지를 다져갔다.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치료해주는 가족의 관계를 들여다 보는 ‘걸어도 걸어도’는 냉소적이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기묘한 정서를 안겨준다.
‘아무도 모른다’는 칸 수상 효과에 기대 3만4,515명이 보았고, ‘공기인형’은 1만2,755명이 찾았다. ‘걸어도 걸어도’는 2만1,378명이 보며 꽤 두터운 팬층이 존재함을 입증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칸영화제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디스턴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심사위원상 수상),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공기인형’과 ‘태풍이 지나가고’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각각 진출했다. 가와세 나오미, 미이케 다카시 감독과 함께 서구 예술영화 관객들이 가장 주목하는 일본 영화인이다.
‘기적’이 일으킨 기적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은 고레에다에게 전환점이 된 영화다. 어둡고 외로운 기운을 주로 전하던 고레에다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밝은 정서가 강해진다. 경제적인 이유로 후쿠오카와 가고시마에서 각기 아버지, 어머니와 사는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신칸센 열차가 마주 지나치는 곳에서 소원을 빌면 가족이 함께 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에 여행 길에 나선 형제의 모습이 웃음과 감동을 제조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원래 일본 철도회사 JR의 광고를 위해 기획됐다. 새 신칸센 노선 개통을 앞둔 JR이 고레에다 감독에게 열차가 나오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겠냐고 제안을 했고, 고레에다 감독은 “내용에 전혀 간여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으로 연출을 맡았다. 제작비의 4분의 1을 JR이 지원했다. 영화의 원제는 ‘奇蹟’(기적). 영문 제목은 ‘I Wish’(나는 소망한다)였다. 국내 개봉 제목은 마케팅 관계자의 고뇌 끝에 나온 산물이다. 단순히 ‘기적’이라고 원제를 번역해 쓰면 1970년대 영화 분위기가 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라는, 동심 어린 발랄한 어투가 가미된 제목 덕에 영화는 스크린 밖에서 대중성을 얻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원제나 영문 제목을 직역해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고 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4만2,084명을 불러모으며 고레에다 감독 작품 중에서 국내 최고 흥행 수치를 기록했다. 국내 영화계에서 고레에다 감독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흥행 잠재력을 확인한 영화 수입사들은 고레에다 감독의 신작 구입 경쟁을 벌였다. 한 수입사 대표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이후 고레에다 감독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고, 일본 영화사의 구매 조건도 훨씬 까다로워졌다”고 밝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여러 영화사들의 치열한 다툼 끝에 개봉하게 됐고, 12만5,207명이 관람하는 ‘잭팟’을 터트렸다. 다양성영화 시장에서 10만 관객은 1,000만 관객에 버금가는 흥행 수치다.
유전자와 열차
지난해 개봉한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수입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0만442명이 이 영화를 찾았다. 한 영화계 인사의 말처럼 “‘고빠’(고레에다 감독 열성팬)들이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이후 대중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예술적 결기는 예전보다 못하는 비판도 듣는다. 고레에다 감독은 2011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세상에 대한 시선이 변했다는 인식은 없다”면서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른들을 밝게 하는 네 살배기 딸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밝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이 예전보다 따스해졌다고 하나 바뀌지 않은 점은 있다. 그의 작품은 유전자나 숙명을 소재로 삼은 경우가 많다.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대한 회한으로 이어지는 한 여자의 사연(‘환상의 빛’), 무사태평한 아버지를 닮은 아이들(‘지금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병원에서 뒤바뀐 아이를 뒤늦게 찾은 뒤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남자(‘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처럼 사랑 앞에서 한 없이 약한 딸들(‘바닷마을 다이어리’), 아버지의 도박 습성을 물려 받은 아들(‘태풍이 지나가고’) 등이 스크린에 등장한다. 유전자나 숙명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가족에 대한 고레에다의 세심한 묘사로 관객들은 가족의 의미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열차(또는 전철)에 대한 집착도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들은 열차를 타고 어딘가에 도착하거나 어딘가로 떠난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은 부모에게 버려진 채 새로 살 곳을 찾아나서는 데 지하철이 이동 수단이다. 철도회사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열차가 아예 주인공처럼 등장한다(제목 속 ‘기적’은 기차 기적 소리와 공명한다). ‘환상의 빛’ 여자 주인공 의 남편은 전철과 경주하듯 자전거 페달을 밟고 무언가에 홀린 듯 전철에 치어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다른 자매들은 열차로 이동한 끝에 생애 처음 서로 마주하게 되고, 열차에서 함께 살자는 말들을 주고 받는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인공은 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고향 집에 도착한다. 열차가 품고 있는 여행의 이미지가 가족 이야기와 결합되면서 감정의 진폭을 더욱 키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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