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공약 ‘책임장관제’ 이행
국정 중심을 靑 아닌 내각에 둬야
장관에 힘 실릴 때 공무원들 움직여
대통령의 자발적 권한 위임이 필수
“국정의 책임은 국무위원이 진다. 대통령이 장관보다 측근 보좌관을 더 신임한다면, 차라리 그 보좌관을 장관으로 임명하면 된다.”(남덕우 전 총리의 생전 언론 인터뷰)
정권 후반기 심화되는 청와대의 독주와 일선 부처의 복지부동 현상(본보 8월 16일자 1ㆍ3면)과 관련, 전문가들은 국무위원에게 보다 많은 재량과 책임을 부여하는 식으로 내각의 역할을 강화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를 통해 대통령 지시 사항만 ‘받아 적는 장관’이 아닌 ‘문제를 해결하는 장관’이 되어야 임기 말 복지부동과 이로 인한 권력누수를 최소화할 것이란 얘기다. ‘요금체계 개편불가’에서 이틀 만에 ‘요금체계 전면 재검토’로 바뀌면서 행정난맥을 연출했던 이번 전기료 누진제 파문도 주무부처인 산업통산자원부가 문제를 찾아내서 해결하려는 자세만 있었다면 애초 생기지 않았을 것 게 관가의 공통된 견해다.
특히 16일 개각을 통해 박근혜정부의 내각 진용이 새롭게 구축된 만큼, 차제에 대통령과 청와대비서진, 장관들의 일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하며, 그 해답은 책임장관제 확립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김혁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면 주위의 조언을 구하기가 어려워 정책 결정에 오류가 날 가능성이 많다”며 “해당 문제에 관한 전문가 집단인 부처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관이 외풍 막는 버팀목 역할 해야
책임장관제는 내각이 국정운영의 중심이 되고 청와대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에만 충실하도록 하는 구상이다. 이것은 갑자기 등장한 생뚱맞은 개념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 했던 약속이었다. 박 대통령은 후보 당시 발간된 공약집에서 “국무회의 중심의 집단의사결정시스템을 통해 국무회의의 집단책임성을 확립하겠다”며 “예산ㆍ인사ㆍ조직에 대한 권한을 각 부 장관에게 실질적으로 위임하여 책임 장관제를 확립할 것”이라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문제가 됐던 ‘고소영 인사(고려대ㆍ소망교회ㆍ영남)’ 등의 인사파행을 사전 방지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책임장관제 약속은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다. 청년수당을 둘러싼 일부 장관과 박원순 서울시장 사이의 설전을 빼면 국무회의에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된 사례는 거의 없었고, 장관들이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 적는 모습만이 반복됐다. 반면 청와대는 여전히 정책 결정의 핵심이다. 대통령의 중요 발언이 국무회의가 아닌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외부에 알려지는 것도 청와대가 내각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대통령이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회의를 혼동하고 있다”며 “중요한 메시지가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나오니까 장관들이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일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공직사회 내부에서도 장관의 독립성이 지금보다 좀 더 보장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정무직인 장관이 외풍을 막아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ㆍ과장 급의 소신을 기대하기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한 경제부처 간부는 “장관들은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기만 하고 청와대 비서진은 현장의 애기를 윗선에 전달해 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김철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장관이 버팀목이 되어 주면 공무원들이 그만큼 소신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장기적 시야에서 전문성 있는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영혼 있는 공무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자발적 권한 위임이 전제조건
제왕적 대통령제가 사실상 헌법으로 보장되는 현행 권력구조에서 책임장관제가 도입되려면 대통령의 자발적 권한 위임이 필수 조건이다. 김혁 교수는 “대통령제 하에서는 대통령 혼자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새로운 권력 구조를 만들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당정청 협의의 비중을 지금보다 더 낮추는 것도 책임장관제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제시된다. 김형준 교수는 “당정청 회의에서 당이 장관에게 이것저것 시키는 것은 내각제에서나 하는 일”이라며 “당정청 회의가 강하면 장관의 힘이 약해져 책임장관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청와대 조직을 개편하는 식의 대안도 가능하다. 김혁 교수는 “청와대 비서진을 지금처럼 수직 서열화해 운영하기보다 수평적으로 분산하는 식으로 바꿔 볼 수도 있다”며 “참여정부 당시 정책실장과 비서실장이 동등한 위치에서 사안별 의견을 내도록 했던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세종=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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