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가르친다며 정신-육체 학대
현대차 지리산 등반ㆍSK 무박 행군
‘기마자세 제창’ 지적 받은 신한銀
밤 늦도록 애사시 작성ㆍ낙송케
“상명하복 조직원 만들기 급급”
“능력 위주의 교육문화 조성해야”
국내 한 대기업에 다니는 박은지(26ㆍ가명)씨는 지금도 2년 전 신입사원 연수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온다. 연수가 시작되자마자 그를 기다린 일정은 새벽 4시에 진행된 4.5㎞ 코스 지리산 등반이었다. 산행 전날엔 “정신을 맑게 한다”며 4시간 동안 ‘묵언(默言) 걷기’도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연수원 생활 6주 동안 아침 조회에 늦거나 강의 시간에 졸아 벌점을 받은 사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앉았다 일어났다’ 기합을 받으며 반성문을 써야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 등반에 실패한 사원 5명이 얼차려를 받는 모습을 목격한 것. 박씨는 16일 “다 큰 성인에게 나약한 정신을 탓하며 기합을 주는 것도 문제지만 지병이 있어 등반을 포기한 신입사원에게까지 고통을 가하는 걸 회사 문화라고 자랑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올해 하반기 입사한 대기업 신입사원 연수가 진행 중인 가운데 애사심을 기른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극기훈련식 연수가 여전히 근절되지 않아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기업들은 험한 등반이나 행군 등 업무능력 함양과 무관한 극기훈련이 낯선 회사 문화를 단기간에 익히기 위한 최선의 교육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신입사원 연수에서 지리산 등반을 실시했고 SK하이닉스도 신입사원 연수로 무박 2일 30㎞ 행군을 했다. 해병대 캠프에서 3박 4일간 연수를 진행한 기업도 있다. 한 대기업 식품계열사에 입사한 2년차 직장인 김모(27)씨도 신입사원 연수 시절 해병대 출신 강사로부터 쪼그려 뛰기 얼차려를 수백 차례 받은 기억이 뚜렷하다. 김씨는 “연수원 편의점에서 계열사 제품이 아닌 다른 식품을 사먹다 적발되면 숙소 복도를 오리걸음으로 걷게 하기도 했다”며 “단합은커녕 그나마 남아 있던 애사심도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강압적 연수는 육체적 학대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 역사와 문화를 장시간 강의하는 주입식 정신교육도 원성의 대상이다. 신한은행은 2014년 신입사원 수백명이 ‘기마자세’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글을 제창하는 영상이 공개돼 질타를 받자 교육을 폐지했다. 하지만 해당 일정은 신입사원이 회사를 주제로 직접 시를 지어 낭독하는 시간으로 대체됐다. 지난해 연수를 받았던 김모(28)씨는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시를 짓고 발표를 하면서 회사 사랑을 목청 터져라 외치고 있자니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었다”며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가혹한 연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의 한 계열사 신입사원 이모(25)씨 역시 연수 내내 창업주의 업적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강의가 가장 고역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회사 정신을 구현하는 뮤지컬을 만들면서 세뇌교육을 받는 기분이었다. 굴지의 대기업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입사했는데 연수를 통해 실망만 늘었다”고 말했다.
실제 취업포탈 인크루트가 지난해 12월 중견ㆍ대기업에 취직한 신입사원 4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4%가 연수원 교육 후 ‘입사 포기를 고려하거나 퇴사했다’고 답했다. 신입사원들이 버거워하는 항목은 ‘빈틈없는 일정(18%)’이 가장 많았고 ‘지나친 단체 생활 강조(12%)’ ‘극기훈련ㆍ리크리에이션 참여 강제(9%)’ 등 답변이 뒤를 이었다.
전문가들은 군대식 연수는 인재선발 통로가 대규모 공채로 한정됐던 한국 기업문화가 낳은 악습인 만큼 채용 다변화와 개인의 잠재력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춰 획일적 교육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직무수행 가능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신입직원을 가르치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은 일체감을 갖는 ‘조직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상명하복식 교육에 매달려 왔다는 지적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요즘 세대는 변화에 익숙하고 자아성취를 미덕으로 여기기 때문에 ‘평생 직장’보다는 ‘평생 직무’에 더 관심을 갖는다”며 “팀워크만 강요하는 전체주의적인 프로그램으로는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신입사원 특성에 맞춘 능력 위주의 교육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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