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에서 전통적 산업시설이 하나 둘 떠나면서, 공장이 비워지는 한편으로 재래산업을 대신하려는 새 사업이 호시탐탐 빈 공장부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대선제분 영등포공장이 그 중 하나다.
대선제분은 1937년 일청제분이 설립한 조선제분에서 시작되었다. 영등포공장은 1953년 민간에 불하되었다. 그런데 회사이름은 ‘조선제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후 경영상의 이유로 조선제분이 계동산업의 박세정에게 넘어갔다. 회사 이름은 ‘대선(大鮮)’으로 바뀌었다. ‘조선’에서 ‘조’자를 ‘대’자로 바꾸고, ‘선’은 그대로 사용했다.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간다’는 계동산업 경영진의 신념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분산업은 대표적 장치산업이다. 밀가루 원료인 원맥이 제분공장의 상징인 사일로의 높은 곳에서 각 공정 별로 이동하며 3~4시간의 제조 과정을 거쳐 밀가루로 탄생된다. 그래서 원통형 사일로를 가진 제분공장은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곤 하지만 전자동인 제분공장 건설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해방 후 전쟁을 거치면서 삶의 근간인 의식주 산업이 호경기였고, 이중 제분산업은 먹거리를 책임지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돈과 기술이 필요했던 까닭에 해방 후 제분산업에는 몇 안 되는 업체만이 존재했다. 일본제분의 인천공장이 모태인 대한제분, 조선제분 영등포공장을 모태로 한 조선제분(현 대선제분)이 대표적 기업이었다. 영등포의 산업 중 경성방적이 ‘의(衣)’를 대표한다면, 대선제분은 ‘식(食)’을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의산업’를 대표했던 경성방적은 사라졌고, ‘식산업’을 대표하는 대선제분 공장은 2013년 이후 비어있다.
그런데 공장 주변이 여느 공장 이적지와 크게 다르다. 정문 앞에는 고가도로가 지나고 길 건너에는 사창가가 있다. 다른 쪽은 영일시장에 막혔으며 유일하게 면한 도로는 이면도로다. 개발이 쉽지 않은 여건이다.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공장 이적지에서 지난 3월 반가운 행사가 있었다. ‘쇼의 젊음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서울패션위크 행사가 ‘문 닫은 공장’에서 개최된 것이다. 오랫동안 경제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산업의 변방이 된 ‘영등포 공장 이적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5,000억이 넘는 돈이 투입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폐기된 산업현장에서 동시에 성공적으로 개최된 서울패션위크는 길을 잃은 산업시설에는 한줄기 빛과 같은 행사였다. 공장이 이전하면 그 땅은 당연히 아파트가 주인이었던 영등포에서 공장의 빈 터를 문화로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옛 공장에서 밀가루 대신 ‘문화’가 생산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등포구와 서울시의 관심도 대단한 듯 하다. 근대산업시설을 영등포구를 넘어 한국 문화산업의 중심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지혜가 모이기를 기대한다.
안창모 경기대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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