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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덕 칼럼] 사회 지도층과 부채의식

입력
2016.08.2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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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직자 비리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다. 관련된 절대다수가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 할 만한 부류다. 개선의 모습 없이 사건만 계속 터지는 현실에 지쳤는지, 우리 국민은 더 이상 분노를 느낄 여력조차 없는 것 같다. 일부는 인간의 탐욕이 권력 맛을 보면 다 그렇게 된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 이해를 통해 마음을 추스르고 만다.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의 흥행이 시사하듯, 많은 이들이 부패 권력자들의 몰락을 가상현실에서 보는 데서 위안을 찾을 뿐이다. 마치 조선 시대 민초들이 지배층 양반들의 탐욕을 해학의 대상으로만 삼을 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접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통령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와 현재는 자꾸만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하여튼, 우리 사회의 지도층, 특히 고위 공직자 비리를 탐욕이라는 인간 본성의 발현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인간 본성보다는 우리 현대사, 즉 개발독재 시대의 과도 경쟁과 성공제일주의 속에 형성된 그들의 세계관과 관련이 더 깊다. 그들 눈에, 자신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가가 정한 서열의 저 높은 곳까지 오른 성공한 사람이다. 이것이 자기 집안 배경 덕이건, 개인의 능력 때문이건 간에, 자기가 소유한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자아’ 성취다. 자신의 성공을 사회의 역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를테면 저임금과 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사회적 희생이 경제성장의 근간이었으며, 이 없이는 자신이 성공할 장조차 마련될 수 없었다는 상상은 해보지 않았다. 성공은 개별 노력으로 경쟁에서 승리한 결과니, 그에 대한 보상은 자신에게만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경제적 풍요, 문화적 품위, 말의 권위 등은 자신들이 가져야 할 응당한 대가이며, 게다가 경쟁에서 밀린 이들에 비해 더 가져야 할 것들이다. 국가 주도 아래 모두가 앞으로만 달렸던 개발 시기, 그 경주에서 앞섰던 자신들이 국가 권력을 이용해 특별 포상(?)을 받는 것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최근 논란의 중심인 청와대 비서관처럼 소위 ‘개천에서 용 난’ 경우는 이런 의식이 더 강하다. 그 간의 경쟁 과정이 더 험난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모두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이겨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19세기 말 중동부 유럽 사회 지도층의 의식은 흥미로운 비교 거리가 된다. 그곳의 지식인, 문필가,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일부 국가관료 등은 자신들의 성공에 대해 이른바 부채의식이 있었다. 그들이 이 특수한 의식에 도달했던 전형적 과정은 이랬다. 대부분 유복한 환경 태생인 유년시절의 그들에게 사회는 아름답게만 보였다. 주변의 친구들, 친지들 모두 안정적이고 기품 있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가끔 시위나 폭동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게으르고 무능한 하층민들의 책임 전가 정도로만 생각되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시골 마을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뙤약볕 아래서 새카맣게 탄 사람들이 언제부터였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고된 농사일을 하고 있다. 체구는 바싹 말라 아주 왜소하고, 어떤 이는 반복된 고단한 일 탓인지 허리가 굽어 있다. 갑자기 저들은 왜 저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적어도 그들의 무지몽매나 나태함 탓은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 애초부터 다른 삶의 기회가 있기나 했을까, 나는 저들과 달리 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나. 나, 또는 내 집안 성공의 응당한 대가인 줄 알았던 풍요로움은 원래 그들이 가져야 할 몫이 내게로 오면서 생긴 결과는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 나의 안락한 생활은 세상이 내게 부여한 몫 이상을 내가 가졌기에 가능했으며, 저들의 고역스런 삶은 자기 몫을 나 때문에 덜 가지게 된 탓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들에게서 꾼 빚으로 안락했다면, 이제부터의 삶은 이 빚을 그들에게 갚는 데에 바쳐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사고를 체계화한 러시아 사상가 라브로프는 지식인들은 민중의 희생 속에 고상함과 교육 기회를 얻으면서 그들에게 부채를 졌으니 마땅히 부채상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쳤다. 당시 이 임무가 체제 내에서 가능하다고 믿었던 많은 이들은 현실정치가나 공직자로서 민초들을 위한 봉사를 택한 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판단했던 일부는 급진적인 길로 나아갔다.

이러한 부채의식은 일제 강점기 러시아 문학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에 우리 역사에서도 낯설지 않다. 빚을 갚기 위해 일부는 무장 독립투쟁이나 계몽운동에 나섰고, 일부는 대민 봉사에 힘썼다. 직접 활동을 못 했던 더 많은 이들도 최소한 채무 불이행의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한편, 개발독재 시대의 경쟁과 성공제일주의를 흡수한 현재 우리 사회의 지도층, 특히 성공한 공직자들에게는 이 의식이 아주 낯설다. 이들에게 다소나마 부채의식을 바라는 것은 몽상일까.

노경덕 광주과학기술원 교수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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