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야 할 방향은 ‘공화’, “양극화 해소하고 재벌이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 평평하게 바꿔줘야 한다”
외교안보는 정통 보수, “기본 바탕은 강력한 한미 동맹, 中과는 이해 번영 위해 노력하되 남북통일을 계속 설득해야”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는… “인사 소통 정책 3가지는 잘 했으면 했고, 계속 말했는데 개혁의 길로 못 가고 허송세월”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의 국회 의원회관 집무실(916호)에는 의정생활 16년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책장과 책상, 테이블이 모자라 바닥부터 높이 쌓인 책과 서류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동료 의원과 당직자, 지지자들이 보낸 글과 액자가 책장 앞을 장식했고, 뚜껑을 열어 눌러도 잉크가 나오지 않는 먼지 묻은 펜들에는 버리지 못하는 사연이 있는 듯했다. 대담에 응하는 유 의원 앞에는 27명의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쓴 '축적의 시간', 존 롤스의 ‘정의론’이 놓였다. 공화와 정의와 보수가 관통하는 줄거리가 있는 대담이었다.
-개혁적 보수를 지향한다고 했다.
“태생적으로 보수이면서 개혁을 말하는 건, 과거 방식에 천착하는 보수는 생명이 다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보수가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저성장, 저출산, 양극화, 불평등, 불공정을 해결해야 한다. 보수의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 오래 고민했다. 보수가 경시했던 정의, 공정, 평등, 복지까지 포함해 민주, 공화, 자유, 성장의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저는 심지어 ‘보수혁명’이라는 표현도 쓴다. 보수가 혁명을 시작하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개혁적 보수는 진보와 무엇이 다른가.
“보수혁명의 길은 진보와는 확연히 다르다. 보수에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도입처럼 국가안보는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다는 투철한 의식이 있지만 진보에는 없다. 보수는 책임감 있게, 실천적으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진보엔 보편적 복지처럼 실천 가능하지 않은 이상이 많다. 선진국 역사를 봐도 양극화, 불평등, 저출산과 저성장 속에서 붕괴하는 공동체를 보수가 개혁을 통해 지켜왔다. 보수혁명으로 자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이 새누리당의 갈 길이다.”
-경제나 정의, 평등은 진보와 함께 할 부분이 많지 않은가.
“진보가 제시해 온 가치 중 나라의 미래를 위해 꼭 함께 가야 할 방향이라면 열린 보수가 진보의 합리적인 생각을 수용할 수 있다. 그런 방향으로 보수가 폭넓게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유승민’의 경제민주화는 어느 방향인가.
“경제민주화보다 경제정의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경제민주화도 정의의 한 요소다. 이제 시대정신은 무엇보다 정의다. 경제정의는 경제ㆍ사회적인 양극화와 불평등을 해소하고, 재벌이 지배하는 한국경제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바꿔주는 것이다. 법적 정의는 불공정과 부패를 해소하는 법치가 핵심이다. 원내대표 시절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을 통과시켰다. 이 사회가 과감하게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재벌 개혁 이야기를 했는데.
“재벌이 과감하고 공격적인 경영이나 투자는 하지 않고 3세, 4세에게 물려주려고 골목상권까지 약탈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선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나 창의, 자유가 발휘되지 않는다. 지금 재벌이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자유경제시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아니다.”
-야당의 어떤 정치인보다 진보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영국 보수당 300년 역사를 보면, 사회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보수당은 그때그때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지평을 넓혀 스스로 개혁을 계속했다. 그것을 국민이 받아줬다. 대한민국의 보수가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왜 진보가 하는 것을 따라 가느냐고 하는데, 좋은 일이라면 보수도 하고 진보도 하면 나라가 더 잘 되는 것 아닌가. 보수를 낡은 보수에 가둬두려는 생각은 바뀌어야 한다.”
-시장경제주의자인가.
“우리 헌법 제119조 1항은 시장경제, 2항에 경제민주화 대목이 나온다. 이렇게 돼 있다 보니 1항이 기본이고 2항은 보조라는 이야기가 많은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묶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유승민이 시장경제주의자냐를 두고 논쟁이 있는데, 지금 대한민국 시장경제는 진정한 시장경제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꼭 필요한 도전, 열정, 에너지가 대기업과 재벌에는 없다. 진정한 시장경제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재벌이 아니라도 기술 기반의 청년기업, 중소기업, 벤처기업이 창업을 하면 그 아이디어가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시장이 펼쳐지는 곳이다. 헌법 제119조 2항을 갖고 와야 진정한 시장경제가 된다는 얘기다. 리우올림픽에서 이름을 드날린 한국 양궁을 두고 ‘최강 양궁엔 파벌이 없었다’는 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양궁엔 피나는 경쟁은 있지만 파벌은 없었고,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하고 선발하는 공정성이 있었다. 저성장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통이 따르더라도 시장과 산업의 구조와 조직을 수술하는 개혁밖에 없다.”
-지난 총선 공천과정을 보면 권력은 국민이 아닌 ‘실세’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피를 흘리고 희생했지만 공화의 가치는 경시하거나 잊었다.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된 뒤 대한민국이 가야 하는 방향은 공화에 있다. 공화주의가 주장하는 것이 사람이 아닌 법의 지배다. 우리는 이 공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정치를 안 했다. 역대 정부가 저출산 해소에 예산을 수없이 집어넣었지만 합계 출산율은 세계 최악이다. ‘성공의 길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있는 사회, 부모의 신분에 따라 성공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능력에 따라 성공이 보장되는 그런 사회, 그런 공동체가 보장이 된다면 국민은 기꺼이 아이를 낳을 거다’. 제 말이 아니라 이탈리아 공화주의의 태두 마키아벨리의 말이다. 국민 마음 속에 이 사회에서 내 자식을 키우기 싫다는 불만과 응어리가 있다.”
-현실 정치 문제로 돌아가면.
“지난 총선 때 공천도 한마디로 공화의 문제였다. 공화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누구에게 굴종하지 않는 자유다. 공화는 자유인으로서 살 수 있는 그런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어떤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교육 받을 기회가 없고 일 할 기회가 없다면 국가가 막아줘야 한다. 어떤 사람한테 예속되고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 새누리당 공천은 사람이 지배했다. 법과 제도가 지배하지 않았다.”
-당시 유 의원의 행보도 그렇게 이해하면 되나.
“어떤 자리를 꼭 차지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정치를 해본 적 없다. 당시 공천 결과에 승복하고 좀 쉬다가 재선거나 보궐선거로 들어오면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람이 지배하는 정치는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굴복하는 정치라면 정치 할 이유가 없다.”
-정부의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진단은.
“저성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지만 이런 패배주의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 선진국이 되는 길을 영원히 잃는다.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기술에 기반한 산업혁명이 필요하다.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이야기했지만 과학기술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올인’(다 걸기)해야 한다. 재벌이 4차 산업혁명의 생태계 조성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막아야 한다. 재벌이 잘 하는 업종은 놔두되 경쟁력을 잃은 부분은 도태하도록 과감하게 시장의 룰을 바꿔야 한다.”
-지금 재벌은 경영권 승계가 현안이다.
“중소기업 가업 상속을 장려해주는 마당에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를 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에 정신이 팔려 도전과 투자, 기업가정신, 과감한 M&A를 등한시한다면 문제다. 우리나라와 중국ㆍ미국과 대비되는 것이 바로 마윈, 마크 저커버그, 스티브 잡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디어와 능력으로 기업을 일궈 돈을 버는 생태계가 아니다.”
-외교안보 철학도 궁금하다.
“정통 보수적 입장이다. 기본 바탕은 강력한 한미동맹이다. 한중관계를 잘 하면 한미동맹에 대처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중국과는 서로 이익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되 남북통일을 계속 설득해야 한다. 군사적으론 ‘거부적 방위력’, 즉 침략을 하면 큰 코 다친다는 생각을 하도록 강력한 국방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통일 후에도 열강 속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에게 필요하다.”
-박근혜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나.
“이번 정부 탄생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 인사, 소통, 정책 3가지는 꼭 좀 잘 해줬음 했고, 계속 말해왔다. 인수위원회 기간까지 3년8개월 동안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개혁의 길로 가지 못했다. 단기 부양책에만 매달려 허송세월 했다. 원내대표 5개월여 역임하면서 김영란법과 공무원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그런 개혁을 지난 3년 반 동안 계속 이어왔다면 평가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주 깊은 회한이 있다.”
-대선에 출마하게 되면 ‘또 TK냐’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대구ㆍ경북(TK) 출신이지만 TK 이익에만 매달린 적은 없다.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TK와 PK가 갈라지고, 대선이나 총선 때 지역주의를 악용해 연대를 하는 것에 국민이 염증을 느끼는 것 아닌가.”
-대선 출마와 관련, 스스로 준비가 돼 있는지 고민하겠다고 했는데.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대통령 되고 나서 성공한 정부,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 힘없고 고통 받는 대다수 국민에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어떤 기대와, 내 자식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진짜 드릴 수 있느냐 하는 확신이 서면 국민에게 솔직히 말하려고 한다.”
-유 의원이 친박계 지원을 받는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있다.
“친박이냐 비박이냐 하면서 당이 이렇게 망했다. 이제 계파 이야기하면 듣지도 않고 대답도 안 한다. 저보고 세(勢)가 없다고 하는데 생각을 같이 하게 되면 세가 느는 거 아니겠는가. 공천이나 자리를 가지고 하는 정치는 오래 못 간다.”
-정치를 하는 가장 절실한 이유는.
“사실 정치 체질이 별로 아니다(웃음). 왜 정치를 하는지 매일 묻고 있다. 즐겁기만 한 게 아니고 굉장히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진흙탕 같지만 정치의 본질은 굉장히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중요한 일이다. 욕을 엄청 먹지만 국가적으로 제일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게 정치다. 그 생각이 없으면 옛날에 정치 그만뒀을지 모른다. 열정을 가지고 시대적 문제를 해결해내는 그런 정치인이 되고 싶다. 정말 따뜻한 공동체, 정의로운 나라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고 싶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등의 후보군이면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이명박ㆍ박근혜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커 정권교체의 민심이 훨씬 강하다. 박 대통령도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이다. 그래서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당과 청와대가 공동운명체가 돼야 하며,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도 똑같이 노력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진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따뜻하고 정의로운 보수’로 가야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 보수혁명을 해야 한다. 대선에서 지기 전에 할거냐, 지고 나서 할 수 없이 할거냐의 선택만 남아 있다.”
인터뷰=이태규 정치부장
정리=서상현 기자 lssh@hankookilbo.com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2017 도전하는 리더들, 시대정신을 말하다
<5> 오세훈 "공존정신은 저성장 극복하는 '추진 로켓' 역할"
<4>?원희룡 제주지사 "진영대결 솥에서 '대통령 독식'이란 장작 빼야"
<2>?남경필 경기지사 “국민 먹고 사는데 보수ㆍ진보 따로 없다”
<1>?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치권, 사회적 불평등 해법 찾아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