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가수가 부르다 만 노래
대본에 없었는데 따라 불러
‘절박함’에 주목하게 된 계기
쉬는 시간 방청객에 노래하기도
2년 전 낸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이 소설의…’)로 음원 차트 정상을 휩쓸고 있는 가수 한동근(23)은 이 노래가 데뷔 곡이 될지도 몰랐다. 그가 2014년 8월 데뷔 앨범을 준비하며 서울의 한 녹음실에서 부른 노래는 ‘이 소설의…’를 포함해 총 네 곡이었다. 데뷔 곡을 정하기 위해 시험 삼아 노래를 불러 보는 자리였다. 당연히 ‘이 소설의…’의 테스트 녹음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앨범에 실릴 곡 녹음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던 만큼, 한동근은 힘을 빼고 편안하게 노래했다. 이 때 부른 곡은 바로 다음 달 발표됐다. “자연스러워 좋다”는 게 그의 소속사 사장의 판단이었다. 이 곡은 2년 뒤 기적처럼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앨범에 실을 정식 녹음도 아닌 습작처럼 부른 노래가 ‘대박’을 친 것이다. 한동근이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를 찾아 털어 놓은 ‘이 소설의…의 알려지지 않은 제작 뒷얘기다.
한동근이 ‘이 소설의…’로 가수 인생을 새로 써 나가고 있다. 온라인 음원 차트는 히트곡 하나 없던 가수의 천하가 됐다. 한동근은 ‘이 소설의…’로 멜론과 지니 등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지난달 25일부터 31일까지 일주일째 일간 차트 1위를 달리고 있다. 발표 당시 100위권에도 들지 못하고 외면 받았던 곡의 화려한 부활이자, 가요계의 이변이다. 한동근의 옛 노래에 엑소(SM엔터테인먼트)와 블랙핑크(YG엔터테인먼트) 등 대형기획사 소속 아이돌의 신곡도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한동근이 주목 받기까지에는 드라마 같은 한 상황이 큰 몫을 했다. 그는 지난달 방송된 MBC 음악프로그램 ‘듀엣가요제’에서 느닷없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출연자로 나온 가수 김필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O.S.T인 ‘걱정 말아요, 그대’를 부르다 말았는데, 후렴구를 한동근이 갑자기 이어 부른 것이다. “대본엔 없던” 돌발 상황이었다. 이 장면이 전파를 타자 네티즌은 그의 ‘절박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노래를 부르고 싶었으면, 남의 노래를 이어 불렀을까란 반응이 나왔고, 그의 방송 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면서 네티즌은 한동근의 열정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김상화 음악평론가)했다.
MBC 음악프로그램 ‘복면가왕’ 관계자에 따르면 한동근은 ‘바람몰이’를 자처할 정도로 무대에 열의가 높다. 판정단으로 나오는 한동근이 TV에 나오지도 않는데 녹화 도중 쉬는 시간에 무대에 올라 방청객에 노래를 불러줬다는 얘기였다. 이적의 ‘다행이다’ 등을 불렀다는 한동근은 “정말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한 일”이라며 웃었다.
한동근은 ‘이 소설의…’를 낸 후 음악 방송에서 한 번도 데뷔 곡을 부르지 못했다. 신인 가수의 무대에 대한 열정이 ‘인간 한동근’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냈고, 지난달 5일 ‘듀엣가요제’에서 우승을 하면서 네티즌으로부터 그의 음악까지 찾아 듣게 한 것이다. 멜론 등에선 ‘이 소설의…’ 외에 한동근이 지난달 24일 낸 신곡 ‘그대라는 사치’도 20위 권에 올라 인기다. “‘실감이 안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 실감하고 있다”는 게 한동근의 말이다.
“음악 포기 할까 고민도”…창법 바꾸고 부활
한동근은 사람을 만나면 “가수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다닌다. 지난 6월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성악 발성을 하는 엉뚱한 모습으로 화제가 되긴 했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개그맨으로 잘못 알고 있어서란다. 3년여 동안 무명 가수처럼 살아 온 그는 “음악을 포기할까란 고민도 했다”고 한다. “서른이 되기 전에 가수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3년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3’에서 우승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동근은 “내 노래를 잘 안 들었다”고 고백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미국 유명 밴드 이글스의 히트곡 ‘데스페라도’ 등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불러 주목 받았지만, 정작 자신은 “목을 긁어 내는 듯한 내 노래 소리가 부담스러웠고, 콤플렉스였다”고 했다.
한동근은 창법을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집에서 노래 연습을 하다 이웃에 하도 욕을 먹어” 이사까지 갔다고. 2015년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하면서 가수로서 희망을 찾은 그는 기교를 빼고 담백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동근이 부른 ‘이 소설의…’은 2000년대 유행했던 정통 발라드 스타일의 곡이다. 가요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R&B 스타일의 노래는 아니지만, 전자 음악과 힙합 그리고 아이돌 댄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청취자들의 감성을 파고 드는 데 성공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등 O.S.T가 대리 만족 시켜줬던 발라드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한동근이 채워줬다”(김성환 음악평론가)는 평이다.
뇌전증 약 먹으며 무대 서는 ‘악바리’
“500원을 넣고 쓰는 동전 노래방에서 노래 연습을 했다”는 한동근은 ‘악바리’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2010년 갑자기 정신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발작을 유발하는 뇌전증(간질) 진단을 받은 그는 아직도 매일 약을 먹으며 마이크를 잡는다. 하지만 그는 호탕한 웃음 소리만큼 그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동근은 휴대폰 메신저 프로그램 프로필에 ‘진인사대천명’이란 문구를 걸어뒀다. 주어진 길은 최선을 다 해 꿋꿋이 걸어가 돼, 결과에는 연연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그는 ‘욕심내면 실망도 큰 법’이라며 친형이 한 말도 적어 자신을 다스렸다.
1일 2년 만에 ‘엠카운트다운’서
데뷔곡 ‘이 소설…’로 무대 올라
“제가 직접 쓴 노래를 들고
많은 분들께 다가가고 싶어요”
“아직도 외모에 자신이 없다”는 그의 목표는 “듣고 보는 가수”가 되는 것이란다. 한동근은 1일 Mnet 음악프로그램 ‘엠카운트다운’에서 드디어 ‘이 소설의…’을 부른다. 곡이 나온 뒤 2년 만에 갖는 감격스러운 무대다. 한동근은 “이 노래를 부른 방송 영상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그 갈증을 풀게 됐다”며 설렜다.
“한 때 음악프로그램을 보지 않았어요.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전 보여주는 게 없어서 위축됐거든요. 최근에 ‘이 사람이 잘 되니 내가 기분이 좋아진다’란 댓글을 봤어요. 정말 큰 힘이 됐죠. 지금 제 인생의 행운을 전부 다 끌어다 쓴 기분이라 걱정도 되는데, 이젠 제가 직접 쓴 노래로 많은 분들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요.”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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