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1로 싸우다가 얻어맞으면 이렇게 쑤실까. 이유도 모르게 찾아 온 몸살기에 총 맞은 곰 마냥 누워있다가 창틀로 넘어오는 냉기에 눈을 떴다. 1대1로도 제대로 싸워 본 적 없으면서 일단 ‘싸움’하면 ‘17대1’이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언젠가 “아빠도 쌈 잘했어?” 묻던 아들에게 지어낸 소싯적 무용담에 등장했을까.
흐릿한 하늘이 궁금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남들보다 머리가 큰 탓도 있을 거다. 머리가 크면 똑똑(?)하다는 속설이 있는데 좋은 건 왜 꼭 내가 예외인 지 억울하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코끼리가 더 억울할 테니 그냥 참기로 하자.
다행히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분명 빗소리였다.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 하다. ‘더 자빠져 계세요’. 맑은 날도 쉴 때 있고 비 와도 할 일 있건만, 주저앉고 싶을 때 발 걸어주는 사람처럼 비가 고맙기 그지 없다. 안심하고 눈을 다시 감으니 속이 쓰렸다. 살짝 올라온 트림에서 몇 가지 주종의 냄새가 났다. 몸살의 이유를 알았다. 오랜만에 다녀온 서울 나들이 탓이었다.
올라가는 버스에서 내내 들판을 살폈다. 명절 때는 운전하느라, 상갓집 갈 때는 깜깜해진 뒤라 보지 못했던 풍경을 즐겼다. 밭에 뭣 들을 심었는지, 벼 상태는 어떤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어떤 변화가 있는지에 눈이 갔다. 이제는 제법 멀리서 봐도 콩 고구마 들깨를 알아 보고, 고추밭에 탄저병이 왔는지 역병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풀이 잔뜩 나 있는 논을 발견하면 형제라도 만난 듯 반가워 고개를 뒤로 돌려가며 유심히 쳐다봤다.
서울터미널에 도착해 행인에게 두어 번 물어보고, U턴 표시 서너 번 만난 끝에 원하던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에 도착했다. 매년 열리는 사진기자 체육대회는 ‘체육’보다 ‘대회’에 의미가 있다. 전국에서 존재만 알고 있던 사람들의 안면을 확인하고, 퇴사한 선후배들도 모처럼 둘러 앉는 자리이다. 2년 만에 참석하니 초면인 후배들이 늘었지만 아직은 아는 사람이 태반이라 다행이었다.
반가워하고 술을 권하고 담소가 이어졌다. “무슨 농사 지어?” “유정란을 해 보지 그래” “선배가 보내주신 양파즙 잘 먹고 있어요” 등등 궁금증, 조언, 보고가 계속됐다. 그 중 공통된 첫 마디는 “농사꾼이 뭐 이렇게 깨끗해?” “꼭 서울사람 같네?” 식의 인사였다. 질문인지 타박인지 모르겠으나 나쁘지 않았다. 정작 시골에서는 촌 사람을 능가하는 촌놈으로 취급 받는데 서울에 와서 깔끔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세수 좀 신경 써서 한 것 뿐인데.
이후로도 선후배들과 나눈 인사는 일관성이 있었다. 시골 농부답지 않다는 내용이다. 좋은 말도 자꾸 들으니 다르게 들렸다. 구례에 내려왔던 한 후배는 다른 사람들한테 고자질하듯 말했다. “원선배 집에 안 가보셨죠? 어유, 시골이 아녀요” 그 친구는 새로 지은 집에 와보고는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지지리 고생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건축비가 서울 중소형 아파트 전셋값보다 적다고 얘기해도 농부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뻐하던 후배라서 살려준 걸 본인은 모를 거다.
도대체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골 농부’가 어떻길래 10년 된 남방에 작업복인 청바지 꼴의 나를 보고 저러는 걸까. 새까만 얼굴에 흙 묻은 옷 입고 나타나야 “그래, 모름지기 농부란 이런 모습이지” 하고 인정할까. 이번 여름, 에어컨 빌딩 숲도 더웠겠지만 긴 소매 긴 바지에 목까지 수건으로 두르고 지낸 농민들의 처지도 한 번쯤 생각해주면 좋으련만 내 맘 같지는 않은가 보다.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엔 이마에 궁서체로 ‘싸그리’라고 쓰인 초록색 모자 쓰고 한 쪽엔 주황색 물장화, 한 쪽엔 진청색 흙장화 신고 오마. 한 손엔 낫 들고, 한 손엔 나락 들고 그렇게 나타나 주리라.
여기 저기 인사 나누며 받아 마신 술이 7종류였다. 거나한 상태로 주말농장 하시는 선무당들한테 한창 농사 기술 지도를 받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나타났다. 싫으나 좋으나 기자들 수백 명이 모였다고 하니 특기인 악수 실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였을 터이다. 나한테도 손을 뻗으며 다가오길래 “저 기자 아닌데요” 하면서 뒷짐을 졌다. 이제 헛웃음으로 악수에 응해주지 않아도 되는 처지이거니와 정치인들이 징그럽게 싫었다. 그들의 염두에 농사가 없다는 것을 5년 동안 체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국회의원은 달랐다. 오른팔을 낚아 채듯 당겨서는 강제로 손을 잡고서야 만족하고 이동했다. 추행 수준이었다.
분한 마음에 앉아 있는데 또 다른 정치인이 다가왔다. 누군가가 나를 농사짓는 전직 기자라고 소개했다. 그의 악수는 받아 들였다. 여자라서 손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 중 농민들을 생각한다는 정당의 대표이고 좀 더 애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행복하시죠?” 술기운이었을까. 그의 말에 부아가 났다. “다른 분은 몰라도 대표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실망입니다!” 주변이 싸늘해졌다. 상관 없이 내친 김에 말을 이었다. “어떻게 농사 짓는 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웃자고 한 인사에 죽자고 달려 들었다.
사실 술기운만은 아니었다. 며칠 전 농협 직원과 동네 형님 몇 분이 같이 한 식사 자리에서 올해 농사 얘기를 나누게 됐다. “풍년 들면 다 같이 망하는 거고, 한 군데 태풍이라도 쓸어야 거기는 보상받고 다른 데라도 살지.” 제법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형님이 풍년을 걱정하며 말했다. 농협 직원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쌀은 대책이 있어야 할 거예요. 정부수매가도 작년보다 낫게 받기 힘들어요. 물량도 줄어들 거구요. 쌓아둘 데두 없어요.” 정부가 대책이라도 내 놓으면 옳다 그르다 말을 하겠지만 그냥 나라에서 방치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농민이 잘 사는 건 욕심이라구 쳐. 농사까지 죽이믄 안 되잖어.” 누군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이런 사정을 헤아렸을까. 대회 막바지에 자리를 정리하던 중 한 선배가 다가와 옆구리에 메고 있던 가방에 뭔가를 쑤셔 넣어 줬다. ‘뭘 또 이런걸’ 하며 돌아보니 어묵 꼬치 5개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눈을 움찔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몇 꼬치 더 넣으려는 선배의 팔목을 잡았다. “선배, 버스를 타고 가야 해서” 라는 이유로 정중히 사양하고 구례로 내려왔다. 선배의 진심이 고마웠다.
눈 떴던 자세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가 빗소리가 약해질 때쯤 전화를 받았다. 이장이었다. 도움을 요청했다. 마을회관으로 가보니 이장은 중년 여성 두 분을 마주하고 앉아서 약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재능 나눔 프로젝트를 위해 현지 조사를 대행하는 진행요원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이장이 인터넷에서 보고 우리마을도 신청하자고 했던 적이 있었다. 의료봉사나 침 뜸 봉사를 받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는데 신청도 하기 전에 알아서 와 준 게 신기했다.
그들은 준비한 질문용지를 앞에 두고 밝은 표정과 상냥한 어조로 취조했다.
“독거 노인은 몇 분 이시죠?”
“생활보호 대상자는?”
“차상위 계층은?”
“거동이 불가능한 분은?”
모든 질문에 “세 명이요”로 답하던 이장이 전화를 받는 척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질문은 나한테 이어졌다. “마을에 예쁜 산책로나 경치가 좋은 곳이 있나요?” “휴양시설을 지을 만한 곳이 있나요?” 나름 성의 있게 대답하다 보니 재능기부와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의 설명은 도시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올 수 있게 시설을 마련하면 방문한 김에 농작물도 살 수 있고, 농가 소득도 올릴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예산을 어떻게 쓰면 좋을 지 조사하는 중이라고 했다. 정부는 재능기부 사업을 돈 대는 재주와 토목공사 기술을 합한 것 쯤으로 생각하나 보다.
어떻게 그렇게 내내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지 신기했다. 보고 있는 내 광대뼈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다시 들어온 이장이 열을 냈다. “펜션 몇 개 짓고, 사람들 자고 간다고 농가 소득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구요, 거기에 좌판 깔고 나물 몇 가지 판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의외라는 듯 갸우뚱 하면서도 여전히 웃으며 얘기했다. “정부가 6차 산업을 지원하는 것도 있고……” 내가 말을 가로챘다. “생산-가공-서비스 합쳤다고 6차 산업이면, 인터넷 깔아서 10차 산업, 미끄럼틀 놓으면 15차 산업인가요? 곱하기로 하면 120차 산업이겠네요. 말이 좋아 6차 산업이지 제대로 되는 데가 얼마나 되나요.” 웃음기가 조금은 옅어졌다.
농가 소득 증대는 농작물을 제값 받고 팔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먼저다, 보여 주기 식으로 시설이나 몇 개 만들어서 농촌 살리기 하고 있네 하려면 안 하는 게 낫다, 뭐 이런 얘기 하는데 조사자들이 이장에게 물었다. “어르신들 파마나 이발 해드리면 좋아하실까요?” 이장이 버럭 답했다. “그라믄 공짜인디 싫어라 할 까봐서요? 애쓰시는 건 아는데, 마을을 관광지로 만든다고 좋아할 사람 없어요. 몰라도 너무 모르고 오셨구마요.” 조사자들이 어렵게나마 끝까지 미소를 유지한 채 회관을 떠났다.
약속 있다는 이장을 먼저 보내고 회관을 나서 트럭에 오르려는데 동네 형님과 마주쳤다. “어디 가? 밥이나 먹었구?” 형님이 밥 같이 먹자는 말씀 같아 다시 내리며 “예, 먹어야죠.. 형님은요?” 그 형님은 바쁜 듯 지나치며 “난 먹구 읍에 가는 길이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형님은 큰 소리로 한 마디 더하며 멀어졌다. “어지간히 혀~” 나도 크게 답했다. “뭘요~” 쉬라는 말은 왜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시동을 걸면서 번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형님 인사가 ‘그만 놀고 일도 어지간히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뜻일까?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하고 출발하는데 모기가 팔뚝을 물다가 날아갔다. 처서 지난 지가 언제인데, 모기들은 구안와사(입과 눈이 비뚤어지는 현상)가 와도 지들끼리 침 놔주며 버티나? 돌아갈 입은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 동안 모기에 대해 너무 모르고 함부로 떠든 것 같다. 지도 지 삶이 있을진대.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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