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누구나 선망하는 밝고 탄탄한 인생의 길이 눈 앞에 펼쳐진 청년 의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의사는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을 수료한 후 동료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국경없는의사회’에 참가해 2011년 아르메니아에서 에이즈보다 무섭다는 다재내성 결핵 환자를 치료했고, 2013년에는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돌봤으며, 지난해에는 시에라리온에서 에볼라 확산을 막는데 참여했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묻자, “가장 밑바닥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고 답한다. 이제 의사보다 사회 활동가라는 명칭이 더 어울린 정상훈(45) 씨가 일본 히로시마ㆍ나가사키 원폭투하 71주기 행사인 ‘희망의 종이학 프로젝트’ 참가단의 일원으로 8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현장에 다녀온 후 한국일보 독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 그를 만났다.
_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가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에볼라가 시에라리온 같은 저개발국에서 발생하면 수천명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만일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면 비교적 쉽게 방역에 성공했을 것이다.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모든 공공장소에 배치됐던 손 세정제를 생각해보라, 사회가 그 정도 대처 능력만 갖춘다면 에볼라 확산을 막을 수 있다. 시에라리온에 만약 제때 손을 씻을 수 있는 깨끗한 물만 있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에볼라는 자연이 초래한 재앙이 아니라, 공동체가 대처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의사로서 전염병 확산을 막지 못하는 사회체계와 그 원인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사고 같은 방사능 유출은 선진국 사회체계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본판 에볼라’라는 생각을 했다. 사고현장에 다녀온 후 세계 3위 경제력을 갖추고, 항상 지진에 철저히 대비해온 나라임에도 일본조차 핵발전소 사고를 완벽히 예방할 수도, 사고 후 수습할 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정치적 스승에서 반핵운동가로 변신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가 ‘일본의 현재 상황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와 같다’고 말했다. 방사능 오염물질이 자꾸 쌓여가는 데 처리할 방법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_사고가 난 지 5년이 더 지났는데, 직접 다녀온 후쿠시마는 현재 어떤 상황인가.
“일본 정부는 방사선 누출로 인한 피해자를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전 일본 정부가 정한 방사선 연간피폭허용량은 1 밀리시버트(m㏜)였다. 이는 ‘1만 명 중 1명이 암으로 사망할 확률’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사고 후 이 기준을 20m㏜로 올렸다. ‘방사선 피폭으로 인해 사망할 확률’이 20배 증가하는 것이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쿠시마 현의 인구가 대략 200만명인데, 이들이 모두 연간피폭허용량인 20m㏜의 피폭을 받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후쿠시마에서는 방사선 피폭으로 인해 4,000명이 암에 걸려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_실제로 갑상샘암 환자가 크게 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올해 3월에 후쿠시마 현 조사위원회사 2011년부터 올해까지 사고 당시 18세 이하였던 총 30만명을 대상으로 한 전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중 172명이 갑상샘암 또는 갑상샘암의심으로 진단됐다. 암은 흔히 10만명 당 발생률로 비교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57명 정도다. 일본에서 소아ㆍ청소년(만 18세 이하) 갑상샘암 발생율이 10만명 당 1명쯤이니까, 57배가 많은 것이다. 또 보통 갑상샘암은 여성과 남성 비율이 7대 1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후쿠시마에서는 성비가 4대 3이었다. 원전 방사능 유출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수치들이다. 하지만 조사위원회는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영향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를 보면서 의료전문가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로 원자로에 있던 몇 명이 사망했다는 건만 인정할 뿐 이후 피폭으로 인한 사망 등은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탈핵시민사회단체 추정으로는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를 제외하고 원전사고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망자가 2,00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산한다.”
_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제염작업을 통해 후쿠시마의 방사능 수치가 안전한 수준으로 내려가 2020년 도쿄올림픽 야구 경기 일부를 후쿠시마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후쿠시마의 주요 도시는 일견 안전해 보인다. 고리야마(郡山) 시 광장에 커다란 방사능 계측기가 설치돼 있는데, 확인해보니 시간당 0.15μSv, 환산하면 연간 1mSv가 조금 넘는 수치가 나온다. 고리야마시 역광장은 안전한 셈이다. 이런 수치를 바탕으로 최근 후쿠시마 중ㆍ고교생들이 도쿄올림픽 성화봉송을 후쿠시마 현의 6번 국도를 따라 진행해 달라는 청원을 아베 총리에게 했다. 아베 총리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며 학생들과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이런 퍼포먼스의 이면에 가려진 것들이 많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20㎞ 떨어진 곳에 나라하정(楢葉町)이란 마을이 있다. 정부는 이곳의 방사능이 연간 20mSv 이하라며 피난지역에서 해제했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마을이 텅텅 비어 있었고, 가이드는 주민 중 10% 정도만 돌아왔다고 한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가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는 것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제염작업이 남긴 쓰레기 임시저장소였다. 낙진으로 오염된 지역의 흙을 10~20㎝ 정도 걷어 낸 후 처리방법이 없어 그냥 쌓아둔 것이다. 후쿠시마에 운동장만 한 공간에 1톤짜리 비닐봉지가 꽉 차 있는 이런 임시저장소가 11만개소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제염 쓰레기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무리하게 피난지역을 해제하고 있다. 해제한 마을 한 초등학교에 학부모들이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운동장 구석구석에서 방사능을 측정했는데, 도랑에서 엄청나게 높은 수치가 나와 개학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왜 이렇게 서두를까. 시민단체들은 도쿄올림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쿄 경제산업성 청사 앞에는 5년 가까이 핵발전소 재가동 중단을 요구하는 탈원전 농성 텐트가 있었다. 그런데 리우올림픽 폐막식을 하루 앞둔 21일 새벽 이 텐트가 기습 철거됐다.”
_방사능 제염 작업에 동원된 작업자들의 상황은 어떤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제염작업에 참여했던 사람을 만났다. 제염 작업에 참가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전국 각지에서 가난한 청년들이 모여드는 걸 보고,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해 취업했던 노동운동가다. 그에 따르면 이런 위험한 작업에 참여한 업체들이 무려 6차 하청까지 층층이 얽혀 있다. 원청이 일본 도쿄전력(TEPCO)인데 제엄작업 참여자에 대한 위험수당을 하루 1만엔으로 정했다. 여기에 일당 1만엔이 더해져 작업자는 하루 2만엔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하청단계가 복잡해지면서 초기에 실제 작업에 투입된 사람은 하루에 1만엔만 받고 있었다. 하청업체들이 위험수당을 숨긴 것이다. 결국 내가 만난 노동운동가가 작업자들을 규합 쟁의를 일으켜 급여에 위험수당을 포함하도록 했다. 현재 제일 밑바닥 하청노동자들은 1만6,000엔 정도의 일당을 받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하청단계가 복잡해지면서 작업자들의 피폭량 측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규정상 작업자는 연간 피폭량 50mSv 이하만 작업에 투입될 수 있다. 또 5년간 100mSv를 초과해도 안 된다. 작업자는 개인별 피폭량을 기록하는 방사선 관리수첩을 의무적으로 소지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하청업체가 계약 기간이 끝난 작업자에게 이 수첩을 주지 않는다. 때문에 이 수첩을 소지하지 않은 채 다른 하청업체로 옮겨가 제염노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직장의료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정기검진을 받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_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5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는 현재 진행형인 것으로 보인다.
“체르노빌의 경우 사고 원자로를 콘크리트로 덮은 후 주변에 방사능이 5mSv가 넘는 구역에는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안전기준을 20mSv로 높인 다음 피폭 지역에 살던 주민들을 다시 들어가 살도록 종용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직도 붕괴된 원자로 내부 상황을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거다. 현재 후쿠시마 사고 원자로는 연료봉이 녹아 내린 다음에 바닥과 만나 떡이 되어 지표와 닿아있는 상태 즉 ‘멜트 스루’단계로 추정된다. 만일 방사능 물질이 원자로 밖으로 흘러나와 지하수와 만나게 된다면 피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확산되는데, 현재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도쿄전력은 사고 원자로 주변지하에 얼음벽을 쌓아서 지하수를 얼려 방사성 물질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동토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도쿄전력은 이 방법만으로 지하수 오염을 완벽히 막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겠지만, 핵발전소 사고는 현재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뛰어넘는 재앙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우리 정부는 신고리 5, 6호기 건설을 승인하면서 우리 핵발전소는 일본과 구조가 다르니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도 6중, 7중의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상상 가능한 모든 대비를 했지만 진도 9의 지진으로 안전장치가 무용지물이 됐다. 인간이 모든 자연재해를 완벽히 대비할 수 있을까. 핵에너지 이용 자체가 현재 인간 공동체의 문제 해결 능력을 뛰어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정리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의사 정상훈은
1998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2002년 서울대학교 의료관리학교실 수료
2003년~2006년 행동하는의사회 대표
2011년~2015년 1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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