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밉다고 중국이 대안일 수 있을까. 진보진영에 알게 모르게 번져 있는 이 관념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조경란 연세대 교수의 글 ‘중국은 ‘제국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가 계간지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렸다.
조 교수의 비판 대상은 최근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이 낸 ‘제국의 구조’(도서출판b) 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중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으로서의 가능성을 크게 포장한다. 옛 제국주의가 약소국가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지속불가능한 형식이었다면, 제국은 억압 대신 상호호혜성을 기반으로 옛 제국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본다.
알려졌다시피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 민족국가를 뛰어넘기 위해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을 끄집어냈다. ‘제국의 구조’는 바로 이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이 중국에 있지 않느냐는 얘기다. 그렇기에 ‘제국의 구조’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거칠 것이 없다. 그는 현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제국을 재구축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심지어 “중국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만들어진다면 소수민족이 독립할 뿐 아니라 한족도 지역적인 여러 세력으로 분해되어 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민주 대신 제국”이라는 주장인 셈인데, 이는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 해도 손색없다.
조 교수는 이런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을 두고 ‘선한 제국’으로서 갖춰야 할 구체적 요건이 단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느슨한 형태의 방목 통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고, 그 역사적 구현태는 바로 조공책봉시스템을 가리키는 듯 하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막연한 희망뿐이니 남는 건 ‘중국의 근대는 서구의 근대와 다르다’는 식의 자화자찬이다.
조 교수는 냉혹하게 중국 내부에서부터 먼저 상호호혜성에 기반한 ‘제국의 원리’를 적용해보라 한다. “정치는 사회주의 체제지만 경제는 신자유주의가 국가제도의 틀을 통해 전사회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곳이 중국”인데, 이런 중국이 자신들의 “격차문제, 소수민족 문제, 부정부패 문제, 생태문제, 종교 문제 등 다원성과 공존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에 제국의 원리 운운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중국의 이런 태도는 낯설지 않다. 신해혁명을 통해 옛 제국의 전통을 끝내고 공화국을 수립한 쑨원마저도 ‘언젠가 되찾아야 할 나라’로 티베트, 몽골 이외 타이, 버마, 부탄, 네팔 등을 포함시켰다. 이들 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아본 적 없는 국가들이다.그래놓고는 ‘우리가 뭘 어째서가 아니라 그들이 문명의 감화를 받기를 원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옛 중국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것이 이러한데, 이 전통을 이어받아 상호호혜성에 기반한 제국의 원리라는 것을 상상해낼 수 있을까.
그렇기에 조 교수의 결론은 가라타니 고진이 ‘제국으로서의 중국’을 내세운 것은 결국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세계공화국의 논리적 파탄”일 뿐이다.
조태성기자 amoraf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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