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팅기업 A사 이모(32) 과장의 최대 고민은 낮 시간에 목소리를 듣기 힘든 총괄(부장급)의 화법이다. 처음에는 과묵하고 진중한 분으로 여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속내를 알 수 없어 체증이 가시질 않는다. 한번은 고객사와 이견이 커 프로젝트가 갈피를 잃고 있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그에게 “여기서 막혔는데 어떻게 보시나요”라고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했다가 문제가 터졌다. 당시 듣는 둥 마는 둥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딴청으로 이 과장을 갸우뚱하게 했던 그가 술자리에서 다른 동료에게 “잔소리 없이 지켜봐 줬더니 상사에게 기어오른다”고 푸념을 늘어놨던 것. 이 과장은 “잔소리나 지적을 무조건 안 하면 ‘꼰대’가 아닌 줄 아는데, 업무에 관해서 만큼은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지적하고 반성하고 해명할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대기업 한모(35) 과장은 최근 새로 부임한 실장이 자기 부서에 뿌린 행동강령 문서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사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최선을 다한다” 등의 모호한 항목들이 적힌 강령에는 ‘확인할 테니 모두 암기해달라’는 지시도 덧붙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 된 걸까” “뭘 보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느낀 걸까” 전 부서원은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강령을 외우는 동시에 이 지시의 배경과 실장의 의중을 추측하느라 진땀을 쏟았지만 결국 어떤 암호도 풀진 못했다.
역할 방기한 겸손 미덕 아니다
최근 중장년의 최대 공포는 ‘꼰대 취급’이다. 미움 받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지라 ‘꼰대 되지 않는 법’을 안내하는 텍스트는 늘 각광 받는다. 추석을 앞두고도 “조카에게 연봉 묻지 마세요” “취업 여부 참견하지 마세요” 등의 대화법을 다룬 뉴스가 비중 있게 다뤄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뜩이나 직언, 직설이 무례로 여겨져 온 동양 문화에서, 요즘 같이 ‘꼰대 척결’ 여론이 비등한 시절에 타인에게 괜한 충고했다간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니 침묵은 꽤 편리한 안전망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황이 악화하는데도 ‘묵언수행’을 고집할 경우 되레 자신의 평판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도대체 말해도 난리, 안 해도 난리”인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까.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명백한 잘못이나, 자신에게 지휘나 조언 의무가 주어진 경우 정중하되 담백하게 말할 줄 아는 ‘정중한 직설’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조언한다. 문제는 말 자체가 아니라 내용과 태도이며, 피해야 할 것은 ‘혼내기’가 아니라 무작정 ‘화내기’이다.
침묵의 부작용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기업이다. ‘꾸짖는 기술’(다산3.0 발행)의 저자 나카시마 이쿠오는 모든 회사에는 의외로 ‘미움 받기 두려워 꾸짖지 못하는 상사’와 ‘진심으로 조언하는 상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부하’가 많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본 전역에서 이 문제를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는 그는 원래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학생들을 올바르게 꾸짖고,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이나 실수를 보고도 미움 받기 싫다는 다소 이기적인 이유로 묵인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자기 스스로에게도 큰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일단 방치된 상대방이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못할 테고, 주변에서는 생각보다 이 방관을 금방 눈치챈다. 이는 곧 관리 능력, 배려심을 의심 받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타인의 신뢰를 잃는 결론에까지 달한다. 이를테면 실수나 실패를 거듭하는 B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내가 번번이 침묵을 지킬 경우, 이를 바라보는 나머지 C, D, E, F는 “저 사람 뒤치다꺼리 해야 하는 건가” 하고 푸념하고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리더가 ‘이게 무슨 감투라고’ 하는 식으로 엉뚱한 겸손의 덕을 빛낼 동안 회사가 급여를 지불한 관리자의 자리는 공석이 되는 셈이다.
일본 행동과학매니지먼트연구소장인 이시다 준은 저서 ‘화내지 않고 가르치는 기술’(21세기북스)에서 “많은 기업에서 직원들이 서로 지도하거나 돕기보다는 ‘수치는 어떻게 나왔냐’고 결과만 묻는 경우가 많다”며 “명확하게 의견은 밝히지 않으면서 ‘저 녀석은 의욕이 없어’, ‘성격이 이상해’ 등으로 단정하는 태도가 주변 분위기를 흐린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 기업에서 소통시간을 측정했던 실험도 소개하는데, 같은 업무를 같은 방법으로 실시하는 영업부들을 서로 비교했더니 실적이 높은 팀은 그렇지 않은 팀에 비해 커뮤니케이션이 양이 3배 이상 많았다.
서로를 위해 가끔은 스스로가 정당한 직언, 꾸짖음을 ‘오지랖’, ‘악행’으로 여겨 회피하는 허구의 틀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한다는 얘기다. 함께 성장하기 위한 솔직한 소통을 강조하는 나카시마 이쿠오는 일본 야구계 전설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삼류 선수는 무시하고, 이류 선수는 칭찬해서 키우고, 일류 선수는 꾸짖어서 키운다.”
직설, 예의 갖춰 구체ㆍ명료하게
정중하고 담백한 직언의 제1원칙은 목적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저 녀석이 나를 열 받게 하다니” 따위 감정은 접어 두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를 테면 상습적으로 회의에 지각하는 부하를 꾸짖기 위해서는 변화시키려는 상대의 행동에만 몰두하고 “몇 번을 말해도 우습게 아는군” 등의 감정은 잠시 접어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
나카시마 이쿠오가 꼽는 직언 시 ‘반드시 피해야 할 방법’은 우선 ▦권위나 지위를 이용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일관성 없이 꾸짖는 태도다. “당신 이 회사 생활 몇 년이나 했지?”, “그렇게 말해도 또 늦다니 게으른 거야, 멍청한 거야, 뻔뻔한 거야, 뭐야?” 등의 표현을 구사하면, 일순간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상대방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인상과 항변, 항의의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날은 넘어가다 갑자기 꾸짖거나 주위에 분풀이까지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한번 타인에게 부당한 취급을 했다는 인식을 받게 되면 회복에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위압적 바디랭귀지나 욕설이 금물인 것은 기본 상식이다.
그는 효과적인 직설이나 꾸짖음의 단계를 ▦알린다 ▦이해시킨다 ▦반성하게 한다 ▦개선하게 한다 등으로 나눠 설명한다. 알리는 단계는 6하원칙에 입각해 명료하고 구체적일수록 좋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직언하고 항의하고 꾸짖을 때 ‘알린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반성하게 한다’에서 시작해, 화자와 청자 사이에 감정적 괴리가 발생하고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 밖에 ▦미리 말할 강도를 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아야 하며 ▦흥분 되면 스트레칭 등을 하며 한 박자 쉬어가고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것 같은 불량한 상대일수록 괜한 격분으로 반격의 빌미나 상황을 모면할 기회를 주지 말고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대한다는 조언도 참고할 만하다.
‘정중하지만 직설적으로’(처음북스)의 저자이자 영국, 프랑스에 기반을 둔 컨설팅기업 인터렉티프의 트레이너 앨런 파머는 이런 담백한 화법을 ‘린 토크(Lean talk)’라고 정의한다. 그는 “아시아인들은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순간에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예’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예의 있으면서도 직설적인 화법이 가장 효과적인 대화법”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말을 뱅뱅 돌리거나 침묵해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인간은 절망하고, 이 절망 때문에 공손한 태도까지 잃어버린 뒤 냉정하고 잔인한 말을 해버리고 만다”고 지적한다.
상습 지각생을 대하는 그의 방법은 이렇다. “앞으로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서, 당신이 시간을 엄수하겠다는 것을 내가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늘 이 문제를 해결 보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회의에 늦는 것은 더 이상 협상 불가합니다. 이제 아시겠죠.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기 위해 늘 염두에 둬야 할 목표는 다음과 같다. 내용은 직설적으로ㆍ간단하게ㆍ구체적으로ㆍ솔직하게, 방식은 정중하게ㆍ예의있게ㆍ침착하게 말하기.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망설이고 침묵을 택하는 이유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상대가 과연 내가 에너지를 쏟을 만한 대상인가, 내게 그런 역할, 보상, 의무 등이 주어졌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괜한 감정 낭비를 피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 아랫사람이거나, 을의 처지일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전략적 침묵이 현명할 경우도 많다. 하지만 반드시 말해야 하겠다고 결심했거나, 말해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진 상황이라면 아랫사람들에게도 이런 원칙들은 도움이 된다.
서점가와 강연계를 메운 숱한 조언들이 공통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듣는 이들은 본능적으로 직설의 목적이 공격인지 조언인지를 파악한다는 것’과 ‘직설하는 화자에게도 자격이 있다’는 점이다. 말을 듣는 사람들은 대체로 본능적으로 솔직히 말하는 사람에게 존경심을 느끼지만 이것도 평소에 그가 존경 받을 만한, 믿을 만한 사람이었을 경우에만 극대화되는 효과다.
직언의 요령을 익혔다면 스스로에게 가장 근본적 질문을 던져보자. 내게는 이 직언의 자격과 의무가 있는가. 의무로부터 비겁하게 도망가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자격도 없는데 선을 넘고 있진 않은가. 스스로는 지적, 직언의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러기 위해 나는 제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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