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현실이다.” 시대착오적인, 머리에 빨간 뿔 돋은 빨갱이가 할 법한 말이다. 이어지는 말이 더 걸작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주도하는 것은 내가 속한 부자 계급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의 적자생존자,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워런 버핏이 미국의 불평등을 한탄하면 내뱉은 말이다.
사실 ‘계급투쟁’이란 단어를 가장 혐오하면서도, 정작 계급투쟁에 가장 능숙한 이들은 부자다. 빈자처럼 ‘계급배반투표나 하는 머저리’ 취급 당할 일 따윈 하질 않으니 말이다. 새로운 계급투쟁의 짱돌 먼저 던진 게 저쪽이니 뭔가 되받아칠 게 없을까 빈 손을 이래저래 더듬어보는데, 이런 젠장.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사라졌다는 마르크스주의 따위밖에 없다. 시대착오적이다. 그래서 호르크하이머, 하버마스에 이어 3세대 비판이론가로 꼽히는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가 새 짱돌을 내준다. ‘사회주의 재발명’(사월의책).
당연하게도 방점은 ‘재발명’이다. 호네트는 “로버트 오언에서 프루동을 거쳐 칼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들”을 재검토한 끝에 사회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프랑스혁명이 약속한 자유 평등 우애라는 ‘목표’이지,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나 사적 소유 폐지나 시장 철폐와 같은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국유화니 계급독재니 하는 건 산업혁명 때에나 먹힐 얘기이니, 21세기엔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호네트가 제안하는 재발명의 키워드는 ‘사회적 자유’다.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북돋아줄 수 있는 자유란 얘기다. 해서 혁명 한 방으로 모든 걸 다 갈아 엎는 것만이 사회주의인 것은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는 망해버렸을지 몰라도, 우리는 자그마한 사회적 개혁을 누적해나가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혁명론자들 눈에는 개량주의적 변절에 불과한 일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해나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호네트는 이렇게 주문한다. “20세기 초창기 사회법의 제정, 서독의 공동결정 규정, 다양한 국가에서의 최저임금 규정 등은 노동시장을 사회화하려는 힘든 싸움에서 쟁취해낸 첫 번째 단계로 보라.”
이런 주장은 이미 1920년대에 ‘사회주의라 해서 무조건 시장을 부정하고, 중앙계획경제를 고집하고, 생산수단 국유화를 추진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내놓은 닐스 칼레비를 떠올리게 한다. 사회주의의 ‘혁명 강박’에서 스웨덴 사민당을 해방시킴으로써, 전후 사민당의 장기집권과 스웨덴 복지모델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 받는 그 칼레비 말이다.
고개를 돌려보자. 지난해 삼성물산ㆍ제일모직 합병 때 논란이 됐던 국민연금의 행보를 기억하는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머니 게임이라 내내 쥐어터지기만 하던 주식시장이 이 때만큼은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굴기도 했다. 하기야 큰 틀에서 놓고 보자면 주식회사 자체가 소유의 분산이자, 소유의 사회화 아니던가. 패러디하자면 호네트의 속삭임은 이렇다. “재발명된 사회주의는 이미 와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
다만, 궁금증은 남는다. 이런 호네트식 사회주의라면, 민주주의와 얼마나 차별성이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라도 ‘사회주의’란 이름이 계속 이끌려나오는 건, 부자들의 능수능란한 계급투쟁 솜씨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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