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못지킨 장남의 사부곡
땅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뜻 좇아
고향서 농사 지으며 기도했지만…
갑자기 상태 악화돼 마지막 못봐
일부 왜곡된 시선에 상처도
“책임자 사과와 처벌이 남은 소원”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연세에 여느 아버지들과는 다르게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가족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셨지요.”
25일 밤 고 백남기(69)씨의 장남 두산(32)씨는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속 아버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난해 11월 백씨가 상경 시위 도중 경찰 물대포를 직격으로 맞고 의식을 잃은 뒤에도 땅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전남 보성에서 농사를 지어오던 그였다. 갑작스레 상태가 악화한 탓에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끝내 함께하지 못했다.
1년 가까이 서울을 오가며 백씨의 곁을 지킨 어머니 박경숙(63)씨, 진상규명을 위해 여러 기자회견장과 거리를 누빈 누나 도라지(34)씨, 네덜란드에 거주 중인 동생 민주화(31)씨와 달리 두산씨는 고향 땅에서 묵묵히 흙을 매만지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상주로서 빈소를 지키면서도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며 가족과 주변을 돌보던 그였지만 조문을 온 한 중학생이 서럽게 우는 모습에 만감이 교차한 듯 몰래 눈물을 훔쳤다. “한 번 쓰러지면 원래 6개월을 못 넘긴다는데 아버지가 10개월이 넘도록 버티는 걸 보고 회복하리라 간절히 믿고 기다렸어요.”
백씨가 병상에 누워 있었던 317일은 가족들에게도 고통의 시간이었다. ‘물대포 사건’이란 이름으로 꾸준히 언론에 회자됐지만 하루하루 임종을 준비해야 하는 가족들은 매 순간 절망과 희망의 경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는 “하루 두 차례인 면회시간마다 아버지를 보살피느라 어머니가 힘들어 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보성에 내려와 혼자 있는 내게 반찬거리를 챙겨 주셨다” 며 어머니 박씨를 걱정했다.
가족에게 쏟아진 언론의 관심과 시민들의 위로가 힘이 되면서도 일부 왜곡된 시선에 상처를 입은 날도 많았다. 두산씨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는데 유족과 병원에서 이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냐며 의심하는 시민도 있었다”고 했다. 언론은 특종 경쟁에 눈이 멀어 죽음과 싸우는 백씨를 외면했다. 그는 “매일 생사를 넘나드는 아버지는 나몰라라 한 채 ‘왜 우리하고는 인터뷰를 안 해주느냐’는 항의를 하도 많이 받아 사람을 믿지 못할 지경이 됐다”고 털어놨다. 아버지의 오랜 지인임을 자처한 이들이 병원 중환자실을 찾아 몰래 찍은 투병 사진을 온라인에 공개해 가족들이 부둥켜 안고 운 적도 있었다.
지금 두산씨와 가족에게 남은 소원은 단 한 가지다. 책임자 사과와 처벌. 1년 전부터 되뇌던 요구다. 두산씨는 “아버지는 자신이 왜 살인 물줄기에 스러져야 했는지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며 “이제 죽음의 책임을 묻고 국가폭력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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