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군중을 해산시킬 때 경찰이 사용하는 위해성 장비인데, 살수차에 장착되어 고압의 물줄기를 분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강한 압력으로 물줄기를 분사하는 도구를 가리킬 때 영어에는 시위진압용 ‘워터 캐논ㆍwater cannon’과 소방용 ‘델루즈 건ㆍdeluge gun’으로 어휘가 구분되어 있다. 한국 경찰의 물대포는 농민 백남기씨를 죽게 만들었다.
물대포를 맞은 백남기씨가 의식불명에 빠져 있던 지난 317일 동안, 일단 가장 큰 쟁점이 되었던 것은 백남기씨를 향한 경찰의 물대포 직사 살수가 과연 합법적이었느냐는 것이었다. 백남기씨 가족은 직사 살수가 위헌이라고 헌법 소원을 냈고 언론들은 경찰이 ‘살수차 운용지침’조차도 지키지 않았다고 보도해 왔다.
반면, 경찰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가족들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버텨왔다. 경찰이 이렇게 버티는 배경에는 법 개악의 역사가 있다. 2006년에 시행된 “경찰장비관리규칙”에서 살수차는 ‘진압 장비’ 중에서도 ‘특별 관리’ 대상이었고, 살수차에 관한 규정에는 “최루탄 발사대의 발사 각도를 15도 이상 유지하여 발사되는지 확인 후 사용하여야 한다”와 “20m 이내의 근거리 시위대를 향하여 직접 살수포를 쏘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2008년 12월에 개정된 같은 규칙에서는 “물포 사용 시 시위대의 거리와 수압 등은 제반 현장 상황을 고려하여 집회시위관리에 필요한 최소한도로 하여야 한다”와 “물포의 관리ㆍ운용에 관하여 이 장에서 정하지 아니한 사항은 ‘물포 운용지침’에 의한다”로 바뀌어 버렸다. 직사 살수를 금지했던 법 조항이 없어지고 동시에 물대포의 사용에 관한 규정이 경찰청장이 만드는 소위 지침에 위임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엄청난 후퇴다. 경찰이 촛불시위 진압 및 해산 과정에서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직사한 것이 법규를 위반했다는 논란이 일자, 경찰은 물대포 직사의 위법 논란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경찰의 시위 진압 편의를 위해서, 시위 군중의 안전을 고의로 무시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악해버렸다.
작년 한 해 동안 경찰의 변명은 이러하였다. 백남기씨는 폭력시위대에 속해 있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진압은 설령 죽음을 야기했다고 하더라도 과잉진압이 아니며, 경찰은 잘못을 인정할 수도 없고 사과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인 인권에 관해서 묻고 싶다. 폭력시위대에 속한 사람은 죽여도 되는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의무인 경찰관을 시민 살해자로 만들어버린 나쁜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얘기인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번 사태의 진정한 핵심은 물대포 진압의 합법성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경찰 직무 수행의 정당성을 본질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형식적인 법규가 아니다. 그 정당성은 시민의 동의와 공중의 신뢰에 의해서 실질적인 내용이 채워진다.
브렉시트 후 영국 총리가 된 테리사 메이는 내무장관이었던 시절에 물대포 사용을 승인해달라는 영국 경찰의 2014년 3월 요청을 1년 4개월의 장고 끝에 거부했다. 메이가 물대포 사용을 불허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시민이 직간접적 부상을 입을 수 있고, 둘째, 빠르게 흩어지며 움직이는 시위대를 애초 의도대로 흐트러뜨리는 효과는 적으며, 셋째, ‘시민의 동의에 의한 경찰력’이라는 경찰 전통이 훼손될 수 있고 시민들 사이에 경찰력의 합법성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시민의 동의 없는 물대포는 결국 ‘무대포’ 살상 도구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시민의 동의에 의한 경찰력’이란 1829년 영국이 근대 경찰을 창설하면서 만든 9개 항의 ‘법 집행 원칙’을 관통하는 주제인데, 이 원칙들은 경찰이 공중의 협력과 신뢰를 얻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 원칙 중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경찰은 언제나 공중과의 관계를 유지해나가야만 하는데, ‘경찰이 공중이며 공중이 경찰이다’라는 역사적 전통에 알맹이를 부여하는 것이 공중이다. 경찰이란 공중의 한 구성원일 뿐인데, 공동체의 안녕을 기도하는 모든 시민에게 부과된 의무와 관련해서, 단지 돈을 받고 풀타임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구성원인 것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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