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년 차이다. 2005년 11월 15일 서울 여의도에서는 전국농민대회가 열렸고, 2015년 11월 14일엔 서울광장 등 서울 곳곳에서 민중총궐기가 열렸다. 2005년엔 농민대회 참가 후 귀가한 농민 전용철(당시 44세)씨가 사고 9일 만인 24일에, 현장에서 크게 다쳐 투병 중이던 홍덕표(당시 68)씨가 12월 18일에 숨졌다. 2015년엔 집회 현장에서 쓰러진 백남기(69)씨가 의식을 잃은 채 317일을 버티다 2016년 9월 25일 숨을 거뒀다.
▲백남기 씨가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출처: 오마이TV)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현 정권은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는 입장이다. 시위 참가자의 희생이 공권력의 책임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다.
2005년엔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표였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한나라당 부대변인이었다. 한나라당은 전씨가 숨진 뒤 닷새 후인 11월 29일 공식 논평을 통해 “농민의 죽음이 과잉진압과 연관이 있는지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한다”며 “당연한 사과와 보상 등 정부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반면 이들이 행정부의 수장과 여당 대표가 된 2016년 백남기씨가 숨진 날 새누리당은 “시위가 과격하게 불법적으로 변하면서 파생된 안타까운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는 논평을 냈다. (관련 기사 보기: 노무현 정부에서도 시위대 사망 사건이 있었다)
극과 극을 오가는 이런 입장 변화를 단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달라서’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지난 2012년 대선에서 행사한 소중한 한 표가 아까운 사람들이 많을 터. 분명 ‘지금은 공권력의 탓이 아니고, 당시엔 공권력의 책임’이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05년과 2015년을 복기했다.
시위 양상
당시 보도에 따르면 2005년엔 쌀 시장 개방을 두고 정부 입장에 반대한 농민 1만 여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국회 앞까지 행진을 시도한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농민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돌을 던졌고, 경찰은 물대포를 쐈다. 이 과정에서 경찰버스 4대가 전소됐고, 농민 58명과 경찰 75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2015년엔 주최측 추산 13만명, 경찰 추산 6만4,000여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시위대29명, 경찰 113명이 부상 당했으며, 완파된 3대를 비롯해 경찰버스 50대가 파손됐다. 청와대 쪽으로 행진을 시도하던 일부 시위대가 경찰이 설치한 차벽을 무너뜨리려 밧줄을 동원해 경찰버스를 끌어내려고 시도했다. 시위대 중에는 쇠파이프와 돌 등을 동원해 물리력을 행사한 이들도 있었다. 경찰은 물대포와 캡사이신 최루액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백남기씨는 직사로 살수된 물대포에 맞고 뇌출혈로 쓰러진 뒤 끝내 숨졌다.
경찰의 반응
2005년과 2015년은 공통적으로 시위대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경찰 측 반응과 경찰의 과잉 진압을 규탄하는 시위대 측의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2005년 당시 경찰은 “(경찰 측) 부상자 중엔 실명위기에 처한 의경 이재성 상경과 뇌 신경이 손상된 의경 이용규 상경 등 심각한 부상자가 많다”며 “버스 방화, 기물파손, 폭력 등을 저지른 불법 집회를 주도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집행부 10여명을 강력처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15년에도 불법 폭력 시위에 대한 경찰의 강경한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김현웅 당시 법무부 장관은 담화문을 발표해 “정부는 불법 집단행동이나 폭력행위에 대해선 ‘불법필벌’ 원칙에 따라 빠짐없이, 신속하고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2014년 해산된 통합진보당 세력이 시위에 참가한 것을 두고 배후세력을 추적해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 정도이다. 또한 당시 구은수 서울경찰청장은 의식불명에 빠진 백남기씨와 관련해 “애초에 폴리스라인을 훼손하고 불법집회로 변질시킨 책임은 시위대에 있다”고 밝힌 뒤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사고 경위를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사인 논란
2015년에 경찰이 “사고 경위를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한 약속은, 백남기씨의 투병이 장기화되면서 함께 지지부진했다. 사실 이번에는 동영상 등을 통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처음부터 촬영돼 사고 원인이 처음부터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부검을 신청해 법원으로부터 기각 당하자 재신청하기까지 했다.
동영상 등 직접적 증거가 부족했던 2005년엔 사인 자체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인권위가 12월 26일 자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책임 규명의 전기가 마련됐다. 당시 인권위는 전용철씨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떠밀려 넘어지면서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경찰의 직접적인 책임 여부를 밝혀내지 못했지만, 홍덕표씨의 사망에 대해서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던 중 경찰의 방패에 뒷목 등을 가격당하여 경추 손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혀 경찰의 직접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전용철씨 사망 직후 “집회 후 귀가해 지병이 갑자기 악화해 집 앞에서 쓰러진 것”이라고 했고, 경찰청장은 “(고인은) 간경화 말기인데다 술을 마신 후 구토하고 쓰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반발을 샀다.
또 당시엔 숨진 두 농민에 대해 부검이 실시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전씨가 넘어지면서 뇌출혈, 두개골 골절 등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는데, 경찰은 이를 “구타가 아니라 넘어져서 다쳤다는 것을 뜻한다”고 왜곡해 국과수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즉 경찰이 시위대 사망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정황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정부의 대응
▲노무현 대통령 대국민 사과(출처: KTV)
가장 극명하게 다른 건 정부의 대응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위 조사 결과 발표 이튿날인 12월 27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사죄 말씀 드리고 아울러 위로 말씀 드립니다”라며 사과했고, “인권위 권고에 따라 정부는 책임자를 가려내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국가가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다. 대국민사과 이틀 뒤 허준영 당시 경찰청장은 사퇴했고, 시위 진압을 지휘했던 기동단장은 직위해제됐다.
그러나 강신명 경찰청장은 사퇴는커녕 지난 12일 열린 청문회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무조건 사과할 순 없다”며 끝까지 사과조차 거부했다. 백씨가 숨진 후에도 청와대는 대변인 브리핑 등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등 무시로 일관했다.
2005년과 2015년. 지금만 불법집회였고, 당시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방패든 물대포든 공권력의 가해에 의해 시민이 숨진 사실은, 어쩌면 채증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015년이 훨씬 쉽게 판별할 수 있다. 실제로 백남기씨가 직사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모습, 그 후 그를 도우려는 시민들에게도 물대포를 발사한 모습은 고스란히 영상에 담겼다. 적어도 언론보도만 놓고 본다면,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려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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