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찍는 두 달 동안 “이렇게 우울한 경험은 처음”이라며 짧은 한 숨을 내쉬었다. “평생 몰라도 될 경험을 하게 한 이재용 감독이 원망스러웠다”고도 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10월 6일 개봉)에서 일명 ‘박카스 할머니’로 불리는 성매매 여성, 윤소영을 연기한 윤여정(69)은 그렇게 투덜대듯 쓴 소리를 했다.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은 칠순의 여배우라도 수치스러운 장면들은 견뎌내기 어려웠을 터다. 28일 오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윤여정을 만났다. 비좁은 여관방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조차 비참하게 느껴졌다는 그는 “매니저를 시켜 사온 와인 한 잔이 그나마 위로가 됐다”며 촬영 당시를 회상했다.
윤여정의 말마따나 ‘죽여주는 여자’는 보는 내내 쓸쓸하고 속상하고 아픈 영화다. 이태원의 한 단칸방에서 홀로 살아가는 60대 소영은 노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그의 ‘단골 고객’들이 노년의 고통스런 나날대신 죽음을 간절히 원하면서 ‘자살 조력자’가 된다. 중풍을 맞아 몸을 가눌 수 없거나 치매에 걸려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노인들에게 소영은 작은 빛이다. 영화는 독거 노인, 성매매, 안락사 등 한국사회의 노인 문제를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관객 가슴을 파고든다.
비극적인 사연들 한복판에서 연기했을 윤여정의 도전이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다. 벌거벗은 남자 배우의 사타구니를 마주하고, 공원의 한 귀퉁이에서 정사 장면도 찍어야 했다. 선정적으로 비춰질 이런 장면들은 소영의 쓸쓸한 삶과 노인들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면서 무의미하게 된다. 윤여정은 “이제 내게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닌 현실”이라며 영화의 의미를 곱씹었다.
“제 나이가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입니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잖아요. 한 친구하고는 ‘85세가 되면 스위스로 가자’고까지 했어요. 안락사를 인정해주는 나라니까요. 죽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여서 이 영화를 별 주저함 없이 시작한 것 같아요.”
최근 그가 출연한 작품들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노희경 작가의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비롯해 영화 ‘계춘할망’ ‘장수상회’가 그랬다. 그는 “이제는 여배우가 아닌 노배우”라며 쓸쓸하게 웃었다. “세월이 너무 빨라요.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배우를 할 지 몰랐어요. 이 나이까지 일을 할 수 있어서 ‘(배우)안 했으면 어떡할 뻔 했나’ 싶긴 하죠.”
1966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1971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로 충무로에 발을 들였다. “첫 사랑의 기억이 오래 가듯 첫 영화 ‘화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김기영 감독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자신을 캐스팅하기 위해 매일 찾아오는 통에 “스토킹 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치정과 복수 등 파격적인 소재만으로도 눈길을 잡는 ‘화녀’가 남녀의 달콤한 삼각관계를 그린 로맨스 영화보다 흥미로웠다고. 그래서 윤여정은 그의 성격처럼 화끈하게 김 감독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필름이 비쌌던 시절이라 김 감독은 매일 만화 같은 콘티를 그려와서 리허설을 했어요. 꼼꼼하게 하나하나 대사나 표정 등을 집고 넘어가곤 했죠. 그러다 ‘미스 윤, 저번에 내게 보였던 미소를 이 장면에 넣어봐요’, ‘내게 눈을 흘겼을 때처럼 해봐요’ 등 정말 배우를 많이 관찰하는 감독이었습니다. 그 이듬해 (김 감독의)‘충녀’까지 출연한 이유입니다.”
김 감독은 ‘충녀’를 촬영할 당시 영화 신인이었던 윤여정에게 출연료 50만원을 주며 톱스타 대우도 해줬다고 한다. “이런 걸 어떻게 해요!”라며 할 소리를 하는 ‘까칠’한 성격의 윤여정이지만 ‘화녀’로 호흡을 맞추면서 떡잎부터 알아본 것이다. 윤여정은 “아버지가 미술 선생님이던 김 감독님은 세트장까지 본인이 직접 관여해 지었다. 엄청 꼼꼼하고 깐깐하던 분”이라며 “난 모든 영화감독이 그런 줄 알았다”고 했다. 설렁설렁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여럿 봤다고 귀띔도 했다.
이재용 감독과는 매끄러운 호흡을 자랑하는 듯하다. ‘여배우들’(2009)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2012)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다. 윤여정은 “(‘돈의 맛’과 ‘하녀’의)임상수 감독의 소개로 만났다”고 이 감독과의 인연을 밝힌 뒤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잘 안 맞는 감독”이라고 센 발언도 했다. 너무 세세하고 꼼꼼하다는 게 이유였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윤여정이 선보인 뽀글뽀글 퍼머한 단발머리와 철 지난 청재킷 모두 이 감독의 아이디어다. 하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감독과 세 작품을 같이 한다는 건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 윤여정의 말 속에서 ‘화녀’의 김 감독과 이 감독의 공통점이 보였다.
최근엔 해외 감독과도 친분을 쌓았다. 미국드라마 ‘센스 8’을 촬영하면서 만난 릴리와 라나 워쇼스키 자매 감독들이다. 올 여름 시즌 2의 촬영을 마쳤다. 한국 익산과 독일 베를린을 오가며 촬영했다는 그는 “라나는 한 번 앉지도 않고 촬영하던 열정파 감독”이라고 했다. 자신을 “마마”라고 부른다며 그는 “커다란 딸을 두게 됐다”고 웃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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