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남성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남성도 성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독려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부터 “페미니스트라서 자랑스럽다”고 고백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까지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다양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종종 ‘여성 우월주의’로 잘못 해석되는 까닭에 남성의 권리를 빼앗고 역차별을 일으킨다는 오해를 받았다. 따라서 남성들에게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하나의 장벽처럼 여겨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어난 이유는 뭘까. 페미니즘이 남성도 이롭게 한다고 주장하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여성만 페미니즘 공부하란 법 있나요”
최근 남성들 사이에서도 여성들 못지 않게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연세대학교 여성주의학회 앨리스의 최초 남성 학회장인 방창훈(24)씨는 “학내 단체카톡방 사건을 비롯한 페미니즘 문제들이 사회적 관심을 받으면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학회를 찾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며 “현재 학회의 남녀 비율이 3 대 7 정도인데 남성 회원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여성주의학회의 활동은 다양하다. 남녀 회원들이 성차별에 관한 각자의 경험을 얘기하고 토론하며 학내 성불평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한다. 방씨는 “남성이 적극적인 여성주의 활동을 하면 주변에서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여성학을 통해 남성중심 사회의 불편한 관행이나 문화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자세를 배웠다”며 흡족해 했다.
여성학을 더 깊게 공부하는 청년도 있다. 배용수(29)씨는 서강대 대학원 여성학협동과정에서 석사과정 중이다. 그는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여성커뮤니티 메갈리아 논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성차별 의식 구조의 단면을 봤다. 이를 계기로 그는 남성들도 젠더 체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여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배씨에게 페미니즘은 ‘여성뿐 아니라 차별을 만드는 지배질서와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여성이란 무엇인가’에서 나아가 ‘남성이란 무엇인가’까지 고민한다. 그는 “남자여서 가사노동에서 제외되는 등 각종 혜택을 받았지만 가부장적 문화와 성역할 고정관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며 “여성학을 공부하고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강요하는 문화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오히려 남성성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자들이여, ‘터프가이’에서 해방되자
‘페미니즘은 남자에게 이롭다’는 주장을 펴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이 강요된 남성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본다. 미국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는 저서 '맨박스'에서 "남자다움을 강요 받는 남성들 역시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받고 여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린 성 차별의 피해자"라며 "남자를 둘러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권유했다.
포터에 따르면 남성에게 허용된 감정은 단 하나 분노다. 남자는 어려서부터 감정을 통제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게 '남자다움'이라고 배우고 사회화 돼서 여성이나 타인이 느끼는 두려움에 공감을 표하고 지지하는 일을 주저한다. 남성성이 위협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을 좋아하고 존중하는 선한 남성이 다수인데도 일부 남성의 여성폭력과 혐오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포터의 주장이다.
포터는 선한 남자들이 페미니스트로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강요된 남성성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모든 남성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며 “선한 남자들의 침묵이 결과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부 남성에게 동의하는 신호가 된다”고 강조했다.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포터처럼 남성들이 페미니즘 물결에 동참하라는 주장은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의 저자인 사회학자 오찬호씨는 강한 남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환상을 꼬집으며 남성들의 태도 변화를 권유한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은 조직을 위해 인내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동시에 강한 리더십과 추진력이 있는 초인간적 존재여야 성공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으로 길들여지면서 개인적으로 원치 않는 ‘남성문화’에 편입돼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성별 역할 고착화로 양성평등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오씨는 “페미니즘은 성별을 떠나 시민으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으로 단언했다. 성차별을 해소하는 일이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처럼 당연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 과제라는 뜻이다. 그는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실천 방안을 논의해야 할 시간에 ‘남녀가 불평등한 게 맞느냐’는 식의 소모적 성 대결만 확산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과 교수도 "여성에 대한 일상적 차별이나 억압,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하나로 연결된 현상"이라며 "성매매 문제 등 남성 스스로 외면했던 젠더 이슈에 침묵하지 말고 남성문화를 개선해야 성 평등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활동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당장 남성들의 페미니즘적 사고가 확산될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아직도 페미니즘을 성 대결이라는 틀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언론 칼럼이나 사회관계형서비스(SNS) 등을 통해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남성들의 변화를 촉구했던 몇몇 남성 오피니언 리더들은 관련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페미니즘 연구자가 아니어서 학문에 대한 깊이가 부족하다"며 사양했다. 익명을 요구한 남성 교수는 “성차별 담론이 메갈리아와 일간베스트,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로 대표되는 성 대결에 갇혀 있어서 얘기하는 게 조심스럽다”며 “스스로 여성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라 생각하지만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흠이 없다고 자신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스스로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대학생 김범준(24)씨는 “남성들이 더 쉽게 페미니즘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게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이라며 “누가 남성한테 ‘그런 것은 좀 여성스럽지 않냐’고 말할 때 당당하게 ‘여성스럽다는 게 뭔데’라고 반문해주는 게 작은 실천법”이라고 강조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최유경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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