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고 신해철에게 실례를 범한 적이 있다. “신해철씨가 계속 혼자 음악을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2010년 7월 서울 서초동의 싸이렌 음악원. 신해철이 운영했던 학원에서 만나 음악 얘기를 하다 그에게 한 말이다. 신해철이 밴드 넥스트로 낸 곡 보다 솔로로 낸 결과물에 더 호감이 가기에 나온 얘기였다. 기자는 당시 넥스트의 4집 ‘라젠카’(1997) 이후 넥스트의 음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일상으로의 초대’(1998)를 비롯해 그의 전자 음악 프로젝트에 더 매력을 느꼈고, 그의 베스트 앨범(2002)에 실린 ‘민물장어의 꿈’을 듣고 난 뒤 믿음은 굳어졌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 가사의 울림과 신해철 특유의 세련된 멜로디와 쓸쓸한 정서가 잘 묻어난 곡이 밴드 보단 솔로 앨범에 더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때 신해철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밴드를 할 때 느끼는 희열이 있어요. 뒤에서 (다른 멤버들이) 확 밀어주는 힘 같은 게…” 보컬부터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 연주자까지. 밴드 음악은 협동의 예술이다. 창작에 ‘병풍’은 없다. 보컬의 목소리에 각 악기 연주자들의 연주가 하나씩 포개져야 곡이란 ‘밭’을 일굴 수 있다. 이 협업의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게 밴드 음악이고, 관객들은 그 풍경을 상상하며 밴드 음악에 취한다. 곡 작업의 협업을 생략한 채 목소리와 춤만으로 음악과 무대의 주체가 되려는 일부 댄스 아이돌의 음악에서 얻지 못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신해철과의 인터뷰를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혼자 음악 했으면 좋겠다”는 말의 무례함을 자책했다.
지난 23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 홀. ‘헬로 안테나 레이블 콘서트’는 소리를 만드는 이들이 모여 이룬 협연의 감동을 새삼 깨닫게 해 준 무대였다. 유희열을 비롯해 정재형, 루시드폴, 페퍼톤스, 박새별, 이진아, 정승환, 권진아, 샘 김 등 안테나 소속 뮤지션이 한데 모여 꾸린 공연으로, 이들은 30여 곡을 무려 4시간 가까이 함께 연주했다. 유희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과 정재형이 작곡한 ‘내 눈물 모아’부터, 이진아의 ‘시간아 천천히’와 샘 김의 ‘노 눈치’ 등이다. 유희열과 정재형, 박새별과 이진아는 건반을, 루시드폴과 샘 김은 어쿠스틱 기타를 책임졌다. 페퍼톤스의 신재평은 전자기타를, 이장원은 베이스를 맡아 다른 이가 부르는 노래의 연주를 받쳤다. 권진아와 정승환은 무대 뒤에 코러스로 화음을 보탰다. 음악적 방향성을 함께 하는 선ㆍ후배가 서로의 ‘거름’이 돼 공연을 꾸려 여운을 준 것이다.
자신이 만든 곡도 아닌 남의 노래를 연주하는 건 쉬운 일도 아닐 뿐 더러, 음악인들이 꺼리는 일이기도 하다. 가수로 따지면, 남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데 이미 프로로 데뷔한 이들이 뒤에서 코러스를 넣고 있는 꼴이 돼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날 안테나 소속 뮤지션들은 시작부터 ‘계급장’을 내려놓고 하나가 됐다. 가장 흥미로웠던 이는 루시드폴이었다. 그는 공연 첫 곡인 정재형의 3집 ‘자클린’ 타이틀곡 ‘러닝’이 시작되자 어쿠스틱 기타를 빠르게 스트로크(여러 줄을 내려치거나 올려 치는 주법)해 관객을 놀라게 했다. ‘음유시인’이라 불리며 기타 한 줄 한 줄 차분하게 짚어 내려가던 루시드폴이 기타 줄을 열정적으로 튕기는 모습은 신선하면서 흥미로웠다. 루시드폴이 왜곡된 언론 문화를 꼬집으며 “휴지 보다 못한 너희들 종이 사지 않겠다”(‘치질’ㆍ1998)고 외친, 대학생 시절 밴드 미선이의 추억이 떠올랐다. 루시드폴이 2001년 솔로로 데뷔한 뒤 좀처럼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다.
유희열에 따르면 이들은 저마다의 음악적 고집을 내려 놓고 두 달 여간 합주를 준비했다. 지난해 보다 밭을 더 늘려 제주도에서 귤을 키우고 있는 루시드폴도 틈이 나는 대로 서울로 올라와 합을 맞췄다고 한다. 사람이 늘면 이야기에 살이 붙는 법이다. 저마다의 색으로 홀로 걸어가던 음악인들이 한 데 모여 만들어 낸 협연은, 원곡이 지닌 맛을 더했다. 25일까지 사흘 동안 이어진 공연에는 7,500여 명이 다녀갔다.
이들의 공연을 보니 1990년대 전설적인 음악 공동체로 불렸던 ‘하나 음악 사단’이 떠올랐다. 조동익 장필순 고찬용 한동준 김광진 등이 속해있던 레이블로 협업을 통해 국내 포크 음악의 저변을 넓혔던 공동체다. 대형 아이돌 기획사에 가려 잊고 지냈던, 아니 끝난 줄 알았던 싱어송라이터 공동체의 축제를 안테나가 이어준 것 같아서다. 페퍼톤스의 신재평은 공연 도중 “조직 생활이 이렇게 힘들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록밴드인데, 다른 가수들의 잔잔한 음악에 맞춰 연주를 하려니 좀이 쑤실 만도 하다. 이해한다. 하지만, 좀 더 참아줬으면 좋겠다. 싱어송라이터들의 협연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안테나의 수장인 유희열의 ‘직원’들을 향한 ‘갑질’이 ‘안테나 레이블 콘서트’에서 계속 되길 바라는 이유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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