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정경 유착’ 논란에 휩싸인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대해 역할 재정립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익단체 어버이연합에 자금을 지원하고 청와대 비선 실세 개입 의혹이 불거진 문화재단 미르ㆍK스포츠재단의 설립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자유시장 경제 창달과 국민경제 발전이란 설립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야당과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에 이어 보수 성향의 경제단체까지 전경련 해산을 요구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신산업 발굴을 위한 씽크탱크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담당하는 공익 조직으로 탈바꿈돼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국가미래연구원과 경제개혁연대는 4일 공동성명을 내고 “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해치는 정경유착에 휘말려 국민 경제 발전에 역행한 전경련은 존립 근거를 잃은 만큼 회원사들이 결단을 내려 해산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두 단체는 “전경련이 문제가 되고 있는 재단을 해산하고 새로운 통합재단을 설립하겠다고 했지만,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재벌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 성향의 단체인 경제개혁연대와 달리 국가미래연구원은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곳이다. 국가미래연구원을 설립한 김광두 원장(서강대 석좌교수)은 한 때 박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리기도 했다.
두 단체는 미르, K스포츠재단 사태 외에 2011년 전경련이 주요 회원 기업에게 로비 대상 정치인을 할당하는 문건이 폭로됐던 사건, 친정부 성향의 어버이연합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 등을 문제로 거론했다. 이들은 “각종 불법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전경련은 형식적인 사과와 윤리선언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할 뿐 근본적인 자정과 개혁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일부 회원 기업들의 전경련 이탈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이날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과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의원들 질의에 “전경련 탈퇴를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전경련의 정격유착 논란은 이번 정부 들어 두드러졌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했을 때는 전경련 산하 단체인 자유경제원이 이를 지지ㆍ홍보하는 활동을 벌였다. 노골적인 관제 집회ㆍ시위를 주도한 어버이연합에는 한 선교단체 계좌를 통해 5억원이 넘는 자금을 우회 지원해 논란이 됐다. 한 재계 관계자는 “2004년 정치자금법 개정 이후 전경련을 매개로 한 기업 모금 관행은 사실상 사라졌는데도 유독 현 정부 들어 정치적 민원을 해결하는 역할이 커졌다”고 말했다.
정경유착 논란은 전경련의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 전경련은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 직후 ‘경제재건 촉진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다. 당시 재벌기업들이 ‘부정 축재자 처벌’을 피하는 대신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재건에 헌신할 것’을 약속한 결과물이었다. 한국경제인협회에서 68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전경련은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지만 굴곡진 한국사에서 자유시장주의를 표방하면서 산업 발전을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도 받았다. 실제로 설립 초기 외국 자본 도입과 수출 자유지역 조성을 건의해 기업규제와 수출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등 경제 활성화의 선봉에 섰다. 대형 국책공사가 있을 때는 과당경쟁이 생기지 않도록 업체간 공사 물량을 조정하는 등 재계의 ‘맏형’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고,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등 ‘정경유착의 표본’이라는 꼬리표도 붙었다. 실제로 88년 청문회 때는 전두환 대통령이 설립한 일해재단의 자금을 전경련이 주도해 모금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이 추진됐던 과거와 달리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뀐 만큼 전경련의 활동 목적과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부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정리하고 내부 구조를 개편해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손성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경제가 재벌 위주로 발전한 것을 감안하면 전경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며 “지배구조를 개편해 공적인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외부 인사를 영입한 뒤 균형 있는 활동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전경련은 기업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는 기구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해체보다는 다른 조직들과 통합하거나 투명화하는 방식으로 개혁해야 한다”며 “입법 과정에서 여러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전경련의 순기능도 큰 만큼 외부인사를 영입하고, 엄격한 회계 처리 등을 도입함으로써 정경 유착 관행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역할을 산업 정책을 개발하는 씽크탱크로 바꿔야 한다는 고언도 이어졌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전경련의 해체를 거론하는 것은 성급하다”며 “정경유착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은 대외협력 인력을 줄이고 정책 연구 인력을 충원해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정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회원사와의 소통을 통해 경영 사례를 공유하는 본연의 기능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필상 서울대 겸임교수는 “신산업 발굴을 위한 프로그램 마련, 중소기업 지원, 경제력 집중 완화 등에 전경련이 새로운 역할을 한다면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는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지난 50년간 경제에 미친 영향이 부정적이었는데 과감한 변신이 불가능하다면 해체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회원사인 기업들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 놨다.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기업에 대한 이슈가 발생했을 때 전경련을 통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면서도 “국민적 신뢰를 잃은 만큼 운영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회복을 위해 전문성을 강화하고, 기업이 필요한 것은 정부에 건의도 하는 등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준규 기자 manbok@hankookilbo.com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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