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취업ㆍ결혼 앞두고 개명 신청
신분증ㆍ통장ㆍ자격증 재발급
인간관계 혼란도 기꺼이 감수
대체로 심리적 만족감 높아져
손아섭 선수 등 승승장구 사례도
“삼순이만 아니면 되지.”
10년 전 방영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오는 이 명대사에는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매사 꼬인다고 생각하는 30대 초반 여주인공의 한 맺힌 인생이 압축돼 있다. 하지만 ‘헬조선’ ‘흙수저’라는 씁쓸한 청년신조어가 나도는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20ㆍ30대 젊은이들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워진 취업문을 뚫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원하는 짝을 만나기 위해 작명소를 찾아 멀쩡한 이름도 바꾼다. 아무리 ‘노오력’(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하라는 신조어) 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개명을 통해 운명을 개척하려는 것이다. 과거엔 취업이나 결혼을 위해 얼굴을 뜯어고치는 성형을 했다면, 이제는 이름을 뜯어고치는 ‘이름 성형’에 나서는 셈이다.
매년 15만명 개명 인구 가운데 2030은 43%… 26~35세는 24%
교원임용시험에 두 번 낙방한 전세미(29ㆍ가명)씨는 올해 초 이름을 바꿨다. 매번 간발의 차로 시험에 떨어지자 어머니와 함께 찾은 철학관에서 개명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역술인은 “사주와 이름에 쓴 한자가 맞지 않아 일이 안 풀리는 것”이라며 “최근에 이름을 바꿔준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거의 합격했다”고 꼬드겼다고 한다. 전씨는 “이름 하나 바꾼다고 곧바로 시험에 합격한다는 말을 100% 믿진 않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안에서 쓰는 돌림자도 버리고 철학관에서 추천한 이름으로 바꿨다”고 했다.
결혼 2년 차인 이유진(31ㆍ가명)씨는 지난해 결혼을 앞두고 이름을 바꾼 경우다. 예비 남편과 사주를 봤는데 “결혼하면 주변에 사고가 많이 생겨서 가정이 불행해질 팔자의 이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점집을 찾으면 “좋은 이름이 아니라서 개명하라”는 말을 여러 번 듣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앞두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씨는 “개명하면 여권이나 통장, 운전면허증도 재발급 받아야 하고 사회생활도 불편하지만 작명소를 여러 군데 돌아다니다 결국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바꿨다”고 했다.
개명으로 운명을 재개척하기 위해 작명소 문을 두드리는 20ㆍ30대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특히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청년실업률(9.3%ㆍ올 8월 통계청 발표) 속에 취직이 안 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초혼 평균 연령이 남성은 32.6세, 여성은 30세(2015년 기준)로 해마다 높아지는 등 결혼시장에서 맘에 드는 상대를 찾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져 이성에게 호감도가 높은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도 늘었다.
5일 대법원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이름을 바꾼 20ㆍ30대는 전체 개명 인구(14만6,416명ㆍ판결 후 관서 등록 기준)의 42.8%(6만2,700명)에 육박한다. 그 중에서도 취직, 결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26~35세 비중은 23.8%(3만4,936명)에 달한다. ▦2011년 23.3% ▦2012년 23.9% ▦2013년 24.5% ▦2014년 24.6%로 26~35세가 전체 개명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다. 성별로 보면 20대 미만 연령에서는 엇비슷했던 남녀의 개명 인구가 20대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1.5배, 30대가 되면 2배 이상 이름을 더 많이 바꾸고 있다. 남성보다 이름에 더 민감한 여성들이 결혼 적령기를 앞두고 개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명 열풍… ‘책임의 개인화’ 현상
개명에 성공했다고 해도 이후에 치러야 할 수고가 만만치 않다.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통장이나 각종 자격증, 보험계약서, 여권 등에 기재된 과거 이름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에 바꿨다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혼란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을 다 받아들이면서까지 개명을 하는 건 현재 청년들의 처지가 그만큼 절망적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제 개명의 효과는 어떨까. 개명이 취업이나 결혼운을 100%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을 바꾼 20ㆍ30세대들은 심리적 만족감을 장점으로 꼽는다.‘준호(31ㆍ가명)’라는 이름에서 개명한 회사원 최씨는 “한자 획수가 많아 성명학적으로 좋지 않다고 해서 군 복무 중에 이름을 바꿨는데 그 이후에 딱히 인생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별 탈 없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경민(26ㆍ가명)’에서 이름을 바꾼 고등학교 교사 박씨는 “어릴 적부터 중성적인 이름이 싫었는데 마침 철학관에서 사주와 이름이 안 맞다고 해서 바꾸게 됐다”며 “여성적인 이름으로 바꾼 이후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고 매사에 자신감이 생긴다”고 밝혔다.
‘20ㆍ30세대 개명 열풍’의 진원지 격인 스포츠계에서는 실제 개명 효과를 톡톡히 본 사례가 적지 않다. 2007년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한 손광민(28) 선수는 성적이 부진하자 2009년‘손아섭’으로 개명했고 이후 성적이 급상승해 구단의 핵심 타자로 발돋움했다. 2009년 타율 0.186, 3홈런, 4타점에 그쳤던 그가 이름을 바꾼 2010년에는 타율 0.306, 11홈런, 47타점을 몰아친 것이다. 손아섭 선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성적이 떨어질 곳이 없는 상황이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개명했다”고 밝힌 바 있다. 손아섭 선수의 인생역전은 야구계에 개명 열풍을 불러왔고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올 5월까지 개명해 재등록한 선수는 41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20ㆍ30세대의 개명 열풍을 ‘책임의 개인화’ 현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불확실한 미래를 읽어주던 종교와 과학이 더 이상 그 역할을 못하는 걸 알게 되면서 대체수단으로 점을 보고 이름까지 바꾸게 된 것”이라며 “한국에서 이름이 갖는 중요성이 크다 보니 결혼시장, 취업시장에서 본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얼굴뿐만 아니라 이름도 고치는 이름 성형까지 하게 됐다”고 풀이했다. 전 교수는 이어 “개명 열풍은 결국 일이 안 풀리는 원인을 사회구조 탓이 아닌 나의 이름, 즉 자기 자신에서 찾는다는 측면에서 ‘책임의 개인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책임의 사회화(안 좋은 결과를 사회구조 탓으로 돌림)’와 비교할 때 자기 계발의 동력이 생긴다는 측면에선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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