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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사람들의 시대]디지털 청년에 50년 아날로그 내공 전수합니다

입력
2016.10.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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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철거 위기에 놓였던 상가

제조업 혁신기지로 부활의 꿈

내로라하는 상가의 장인들

‘세운리빙랩’서 기술 공유하고

‘수리수리얍’ 옛 물건도 고쳐줘

입주 예술 작가ㆍ기술 꿈나무 등

늘어난 외부 발걸음서 활력 모색

서울 종묘에서 남산을 바라볼 때 맞은편 도로변에 우뚝 선 건물이 세운전자상가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로 1968년 세워졌다. 세운상가는 종로3에서 퇴계로3가까지 차례로 늘어선 세운, 청계, 대림, 삼풍, 풍전호텔, 신성, 진양상가를 포함하는 대규모 상가 단지다. 교통이 편한 데다 당시로선 최신 호화 건축물이라 초기엔 재벌과 연예인, 국회의원이 살았다. 실내골프장과 사우나, 나이트클럽도 있었다. 1970~80년대는 전성기였다. 왕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 어깨를 부딪치곤 했다. 세운상가 기술자들이 모이면 미사일이나 잠수함도 만든다는 말이 돌았다. 한글과컴퓨터, 삼보컴퓨터가 여기서 태어났다. 그러나 IMF 이후 쇠락했다. 그래도 여전히 점포가 빼곡하다. 전자, 전기, 조명, 오락기, 공구, 기계, 자재, 음향기기 등을 취급하는 세운상가 일대의 점포는 2,800개가 넘는다.

청계천에서 본 세운전자상가.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1968년 지어졌다.
청계천에서 본 세운전자상가.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1968년 지어졌다.

도심창의제조업의 혁신기지로

내년으로 지어진 지 50년 되는 이 낡고 오래된 상가는 사라질 뻔 했다. 허물고 주변에 고층건물을 지으려다가 2015년 계획이 바뀌어 재개발 대신 존치로 방향을 틀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를 되살리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운상가에서 남산까지 보행로를 잇고, 세운상가의 기술력과 외부 인력을 결합해 이곳을 도심창의제조업의 혁신 기지로 만드는 계획이다. 그 중심에 만드는 사람들, 메이커가 있다. 세운상가를 지켜온 뛰어난 기술 장인들, 무엇이든 만들고 공유하기 좋아하는 메이커들, 세운상가 일대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함께한다. 세운상가는 이들을 한데 모으고 연결하는 메이커 플랫폼으로 거듭난다.

세운리빙랩은 서울시의 다시세운 프로젝트 중 하나다. 세운상가의 기술 장인들과 외부의 혁신 주체들이 만나 협업하는 개방형 플랫폼으로 29개의 거점 공간이 들어선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개발, 발전시키고 시제품을 만들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거점 공간에서 벌어질 활동은 전시, 놀이, 상점, 제작 지원, 정보 서비스다. 세운상가의 기술자나 이곳을 찾는 메이커들이 만든 것을 내보이고, 아빠와 아들이 함께 와서 납땜도 하고 이것저것 만들면서 놀고, 창업이나 제품 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기술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문화와 산업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혁신을 이끄는 기지로 변신하는 것이다.

9월 세운상가 5층 중정에 전시했던 손은정의 설치작품. 전자제품과 부품들, 꽃으로 세운상가의 역사를 압축했다. 메타기획컨설팅 제공
9월 세운상가 5층 중정에 전시했던 손은정의 설치작품. 전자제품과 부품들, 꽃으로 세운상가의 역사를 압축했다. 메타기획컨설팅 제공

세운리빙랩의 기획과 운영안을 수립한 메타기획컨설팅은 내년 사업 본격화를 앞두고 지난달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엔지니어 겸 플로리스트 손은정의 설치작품 ‘꽃, 시간의 강을 건너, 시간과 만나다’를 9월 21~28일 세운상가 5층 중정에서 선보였다. 낡은 백색가전과 70년된 진공관 라디오, 초기 PC와 아이팟 등 전기전자 제품과 부품을 쌓고 사이사이에 꽃을 꽂아 꽃처럼 피고 지며 반세기를 이어온 세운상가의 역사를 압축한 작품이다. 이 전시에 이어 혁신적인 조명기구와 오락기를 만드는 개발랩, 세운상가의 기술사와 모든 것을 수집 정리하는 박물지 작업도 진행 중이다. 개발랩에서 나온 제품은 메이커스 위드 카카오를 통해 판매할 예정이다.

메타의 세운리빙랩 책임자인 곽동근 팀장은 “세운상가 전체가 곧 메이커 스페이스”라고 말한다. 세운상가의 메이커 스페이스는 5층의 팹랩서울이 유명하지만, 상가 곳곳 손바닥 만한 점포를 30년, 40년씩 운영하며 기술로 살아온 장인들이야말로 원조 메이커라고 하겠다. 뭐든지 척척 만들고 고쳐서 ‘차박사’로 통하는 차산전력 차광수 사장, 30년째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을 관리해온 전자기술 디렉터 이정성, 전자회로 실습 도구인 브레드보드 키트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홍인전자 조수웅 사장 등 뛰어난 장인들은 세운상가의 귀중한 자원이다.

차광수 사장은 발명학교 만드는 게 꿈이다. 맘만 먹으면 뭐든 만들 수 있다는 그가 지금까지 만든 것은 주력 분야인 발전기를 비롯해 1,000가지가 넘는다. “누구나 발명가, 집집마다 특허증 하나씩 걸기”를 외친다. “발명학교 만들어서 내가 평생 익힌 기술을 다 가르쳐주고 싶다”고 말한다. “남의 발 닦아주다가 내 손이 깨끗해진다고, 가르치면서 나도 배우는 거지”라며 활짝 웃는다.

세운상가에서 '차박사'로 불리는 차산전력 차광수 사장. 맘만 먹으면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그는 발명학교 만드는 게 꿈이다.
세운상가에서 '차박사'로 불리는 차산전력 차광수 사장. 맘만 먹으면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그는 발명학교 만드는 게 꿈이다.

세운상가의 활력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은 세운리빙랩의 산업적 접근 외에 문화와 예술, 공동체 재생 계획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상상력발전소 사업인 ‘세운상가 그리고 메이커스’, 사단법인 OO은대학(땡땡은대학)의 세운공공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 중이고, 세운상가 일대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은 ‘비둘기 오디오 비디오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예술로 낡은 상가에 새 활력을

서울문화재단이 2014년 시작한 서울상상력발전소는 도심의 버려진 공간을 예술로 재생하는 사업이다. 재단은 지난해 행사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에 이어 올해 ‘세운상가 그리고 메이커스’를 진행함으로써 세운상가에서 메이커운동을 본격화했다. 장인의 기술력과 예술가의 상상력을 결합해 세운상가를 제작문화의 거점으로 가꾸는 프로젝트다.

지난해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는 40년 이상 축적된 세운상가 상공인의 기술력을 조명하여 1980년대 이후 잊혀진 세운상가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스피커, 오락기, 전자회로 등을 만드는 워크숍을 비롯해 전시와 토크쇼, ‘빽판’으로 유명했던 예전 세운상가의 추억을 끄집어낸 레코드페어를 열었다.

올해 ‘세운상가 그리고 메이커스’는 세운상가 장인들과 외부 메이커들을 중심에 세웠다. 8명의 세운상가 기술자와 4명의 메이커가 7월부터 기술 교류를 하면서 협업한 결과를 10월 7~30일 세운상가 5층 중정에서 펼쳐 보인다.

제작기술 워크숍(10월 8~9일)으로는 DIY 악기, 반응형 네온사인 조명, 아날로그 TV를 개조한 오디오 비주얼라이저, 손바닥 PC인 교육용 컴퓨터 라즈베리파이를 이용한 오락기 만들기가 기다리고 있다. 백남준 작품의 기술 담당자인 이정성 장인과 함께하는 오디오 비주얼라이저 만들기는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폭발적 관심을 보여 신청 접수 1시간 만에 마감됐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 작품 ‘다다익선’의 모니터 1003대를 구현한 기술자가 이정성 장인이다.

올해 레코드페어는 예전 세운상가 최신 빽판의 보고였던 영레코드를 재현한다. 기술 장인들의도움을 받아 메이커들이 만든 작품을 선보이는 메이커 프레젠테이션(10월 7일 오후 7시)에서는 아날로그 TV를 오디오 비주얼라이저로 활용한 전유진의 전자음악 퍼포먼스, 세운상가의 소리를 담은 유상준의 DIY 악기를 볼 수 있다. 차산전력 차광수 사장도 이때 내보이려고 재미있는 발전기를 만들었다. 태엽 감듯 돌리면 장난감 포클레인, 고장난 뻐꾸기 시계 등 각종 잡동사니가 차례로 움직이며 돌아가는 장치다.

서울문화재단의 이번 행사 실무자는 “지난해만 해도 세운상가 상인들로부터 외부인들이 와서 괜히 시끄럽게 한다는 민원이 많았는데, 올해는 많이 우호적”이라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한다.

OO은대학의 세운공공은 작년 여름부터 하고 있는 세운상가 공동체 재생 활동이다. 주민과 상인 1000여 명 중 300명을 인터뷰해서 그들이 원하는 재생 방향을 들었고, 추억이 깃든 옛날 물건을 가져오면 세운상가 장인들이 고쳐주는 ‘수리수리얍’을 진행했다. 청소년들이 기술 장인들에게 기술을 배우는 손끝기술학교도 열고 있다. 모두 세운상가의 기술력을 중심에 둔 활동이다.

세운상가 일대에는 예술 작가들도 많다. 프로젝트성 전시나 기획, 작업에 쓰는 창작 공간이 40개 가까이 된다. 세운, 청계, 대림 상가와 청계천, 을지로, 종로의 뒷골목에 점점이 박혀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개성 만점 공간들이다. 상권이 죽어서 임대료가 싼 덕분에 2, 3년 전부터 작가들이 들어왔다.

세운상가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창작공간 10곳이 진행하는 비둘기 오디오 비디오 페스티벌의 현장 중 하나인 세운상가 옥상. 대형 비둘기 풍선이 축제를 알린다.
세운상가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창작공간 10곳이 진행하는 비둘기 오디오 비디오 페스티벌의 현장 중 하나인 세운상가 옥상. 대형 비둘기 풍선이 축제를 알린다.
그림 5 비둘기 오디오 비디오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있는 창작공간 중 하나인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의 전시장.
그림 5 비둘기 오디오 비디오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있는 창작공간 중 하나인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의 전시장.

9월 23일 시작된 2016 비둘기 오디오 비디오 페스티벌에는 이 가운데 10개 공간이 참여해 음향과 영상 작업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10월 7일까지 각 공간과 세운상가 옥상에서 전시와 퍼포먼스, 공연, 토크쇼가 이어진다. 전부 둘러보려면 한참 헤매야 한다. 세운, 청계, 대림 상가 자체가 미로인 데다 주변 골목도 꼬불꼬불 좁고 복잡하다. 어지럽게 얽힌 길에 낡은 건물과 녹슨 철공 기물이 널려 있고 쇠 깎는 소리,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의 기술자들, 지금은 폐업한 대중목욕탕 등 대로 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숨어 있다.

세운상가는 아날로그 기술의 메카다. 컴퓨터 관련 업종은 진작에 용산전자상가로 옮겨갔다. 현재 세운상가의 장인들은 50대만 되어도 청년으로 통할 만큼 60~70대 노령이 많다. 다들 젊은이들이 와야 세운상가가 산다고 말한다. 세운상가는 청년 메이커들을 기다리고 있다.

글ㆍ사진 오미환 선임기자 mihwan9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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