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 속에서 선거를 치뤘고 당 대표까지 올랐다. 당에서는 호남 출신, 지역에서는 영남당 소속이라며 거리를 뒀다.
그렇지만 이 대표는 이를 오히려 호남 인심을 헤아릴 수 있는 영남당 출신이라는 강점으로 승화시키며 제 20대 총선에서 지역 타파의 아이콘이 됐다. 덕분에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으로 광주 전남 지역구에서 두 번 연속 새누리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이 대표는 그 기세를 몰아 당권도 거머쥐었다.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을 가장 잘 아는 당내 인사가 그의 강점이 됐다. 그만큼 그에게는 청와대와 새누리당, 민심을 아우르는 연결고리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연히 어려운 관문이 많을 것이란 예상도 함께 따랐다.
그 첫번 째 관문이 이번 정기 국회 국정감사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 출신 국회의장에 맞서 단식 농성을 벌인 것이다.
“근본 없는 놈”
이정현 대표는 195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국회의원 합동유세를 보고 감동해 의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취미가 연설, 특기가 웅변이 됐다. 고등학생 때 전국 웅변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정치인 코스를 밟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으나 시력이 나빠 떨어졌다. 대신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다.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때 구용상 민주정의당(한나라당 전신) 후보에게 ‘정치 똑바로 하라’는 편지를 보내 비서관으로 발탁되며 정치판에 첫 발을 디뎠다. 영남당에서 호남 출신을 대접할 리 만무했다. 정식 공채 과정을 거쳐 선발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말처럼 ‘근본 없는 놈’으로 괄시 받기 일수였다. 그의 앞에는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남들처럼 하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차별화가 필요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첫 도전은 1995년 제1회 동시지방선거 때 광주광역시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한 것이었다. 당시 호남에선 여당이 출마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에서는 그의 도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결과는 뻔했다. 낙선. 호남에서 영남당이 통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휴일없이 일하는 그를 이회창이 눈여겨 보고 불렀다. 당 중심과 끈을 연결하는 계기가 됐지만 그 끈을 확실하게 당겨주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20년 가까이 묵묵히 일했다.
“어쩜 그렇게 말씀을 잘하세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그에게 온 두 번째 기회였다. 한나라당 후보로 광주 서구에 출마했으나 득표율 1.03%로 처참하게 패했다. 그런 그가 운명을 가를 인연을 만났다. 당시 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총선이 끝난 직후 그와 식사를 하며 낙선을 위로했다. 그때 그는 “한나라당의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달라”며 열변을 토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어쩜 그렇게 말씀을 잘하세요”라며 감탄했고 수첩에 무엇인가 적었다. 사흘 뒤 그는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발탁됐다. 박 대통령과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이 대표는 2007년 박근혜 대선 경선 캠프에서 특보와 대변인을 지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한 뒤 당 선대위 홍보부본부장을 제의 받았지만 거절했다. 박 대통령 곁을 떠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감동받은 박 대통령은 “잊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살려주십시오” 1
이 인연은 그의 일생의 꿈을 이루게 해줬다. 우선 여의도행 급행열차 티켓을 받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22번을 받은 것. ‘박근혜 사람’ 중 가장 위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는 ‘친박계 공천 학살’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를 꼬리칸이었지만 열차에 탑승한 것만으로도 쾌속 지위 상승이었다. 개표 당시 20번 후보까지 당선될 것으로 예측돼 여의도에 도착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개표 말미 22번까지 당선되면서 턱걸이로 골인했다.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개표하는 동안 그는 “하나님, 정현이 좀 제발 살려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는 이뤄졌고 후에 “저 같은 사람을 발탁해 준 박근혜 대통령께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승승장구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평의원이었던 때에도 비공식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박근혜의 입’, ‘박근혜의 복심’, ‘박근혜의 그림자’로 불렸다. 그가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는 이유기도 하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다시 험지를 선택했다. 광주에서 다시 도전장을 던졌다. 패했지만 39.7%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총선 스타로 떠올랐다.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됐다. 귀한 성과였다.
같은 해 대선에서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 공보단장을 맡았다.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 홍보수석을 지내며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다 2014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했다. 고향인 순천, 곡성 선거구에 출마를 선언해 당선됐다. 광주 전남 지역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 그리고 승리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20대 총선에서 또다시 당선되며 2선에 성공,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홀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일일이 주민을 만나 예산 폭탄을 퍼붓겠다는 공약이 통했다는 분석이다.
“살려주십시오”2
여세를 몰아 당권에도 도전했다.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인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KBS 보도국장에 전화를 걸어 “한 번만 살려주쇼”라며 보도 통제에 나섰던 녹취록이 공개되며 후보 사퇴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 그의 뚝심이 통했는 지 호남 출신 중에 처음으로 당 대표에 선출됐다.
이 대표의 당선 후 첫 번째 한마디는 “확 바꾸겠다”였다. 그는 “민생 현장에 2, 3명씩 삽 들고 파견해야 한다”며 현장을 강조했고 실제로 선거유세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가 시민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맞서는 것이 정의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여당 소속 의원으로서 자격이 없다”며 여전히 철저한 박 대통령의 복심 노릇을 했다.
“정치를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여당 대표로는 처음으로 단식을 선언하며 국정 감사를 거부한 것은 그에게 분명 시련이다. 이 와중에 당론은 하나로 모이지 않고 국감 복귀와 거부로 갈렸다. 당내 중진들은 따로 회의를 갖고 국감에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당 대표로서 입지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여당이 국감을 거부한 모양새가 부담이 됐는 지 그는 돌연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국감 복귀를 호소했다. 이를 다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 대표가 당론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이 대표로서는 두 번째로 입지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외부에서는 이 대표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정치를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라며 공개적으로 면박을 줬다.
결국 이 대표는 일주일만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며 단식을 끝냈다. 당 안팎에서는 “성과가 없었다”는 비판이 따랐다. 더불어 우려했던 대로 “여당이 국정을 팽개쳤다”는 여론도 팽배했다. 반면 그의 단식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향한 의혹을 막아내는 성과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대표는 취임 후 “국민을 진정으로 섬기는 정당으로 거듭나겠다”며“모든 판단 기준의 잣대는 하나며 국민이다”라고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그런 그의 리더십이 이번 단식 사태로 상처를 입게 됐다. 문제는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당 대표로서 그가 앞으로 닥쳐 올 남은 관문들을 어떻게 헤쳐갈 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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