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재창출 담보할 유력 주자 없는 與
非文 세력 돌파구 찾는 野 모두 솔깃
청와대, 적극 제동 없어…기류변화 감지
개헌론이 정치권에서 또다시 꿈틀대고 있다. 여당과 야권, 그리고 청와대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졌다.
여권에서 제기되는 개헌 공론화 스케줄은 공교롭게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귀국 시점(내년 1월)과 맞물려 있다. 친박계와 비박계가 차기 대선을 대비한 각자의 시나리오에 따라 정계개편의 기폭제가 될 수 있는 개헌을 고리로 ‘권력 게임’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대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 확보를 목표로 했던 야권에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대세론’이 강해질수록 기울어진 판을 흔들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모양새다. 청와대는 여전히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이전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제동을 걸지는 않는 기류다. 일각에서는 연말을 지나면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의 방아쇠를 직접 당겨 정치권 구도를 통째로 흔드는 승부수를 던질 수 있다는 관측을 하고 있다.
“정권재창출 장담할 수 없다”... 여권발 개헌론 가능성 촉각
정치권에서 최근 ‘여권발 개헌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정권 재창출을 담보할 확실한 차기 대선주자가 없다는 게 이유로 꼽힌다. 친박계는 본선 경쟁력 측면에서, 비박계는 당내 경선을 승리를 위한 승부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비박계 수장 격인 김무성 전 대표는 패권주의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헌 관련 발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김 전 대표의 이런 행보는 지지율 정체를 돌파하기 위한 승부수로 해석되기도 한다. 넉 달 넘게 바닥권에서 머물고 있는 그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을 두 자리 숫자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반 총장과의 당내 경선 자체가 무의미해 질 수 있다는 우려가 비박계 내에서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비박계 한 중진 의원은 “김 전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반 총장이 귀국하기까지 100일 정도에 불과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표의 발언 수위는 어느 때보다 높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승자가 독식하는 현행 권력구조가 여야 간 죽기살기 식의 극한 대립을 낳아 정치가 마비됐다”며 “영웅의 시대는 갔다. 여야가 권력을 나누고 연정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을 해야 한다고 나서는 게 최선”이라면서도 “내게 기회가 온다면 차기 대통령 임기를 2년 반으로 줄이겠다”고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친박계는 ‘영입 0순위’로 꼽고 있는 반 총장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긴 하지만 그를 내세워 대선승리는 물론 여당 후보 자리를 꿰찰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을 통해 ‘반기문 외교 대통령- 친박계 실세 총리’라는 안정적인 정권재창출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계산을 진작부터 하고 있다.
관건은 개헌 현실화의 키를 쥔 박 대통령의 의중이다. 지금까지는 개헌 공론화가 국정 동력을 훼손하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집권 마지막 해인 내년에는 국정 동력 확보차원에서 선제적으로 개헌 카드를 꺼내 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여권 일각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 4법 등 일련의 개혁 입법안 처리를 전제로 개헌 추진을 바라는 야권 세력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헌법학자로 박근혜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진박’ 정종섭 의원이 지속적으로 개헌론을 제기하는 자체가 이를 대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정 의원은 최근 “레임덕을 겪어본 전직 대통령이 개헌 필요성 설득해야 한다”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역할론을 제안했다. 한 여권 인사는 “친박계가 개헌을 주도하면 패권주의 역풍이 예상되니, 이 전 대통령의 손을 빌려 차도살인(借刀殺人)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판 뒤흔들 카드” 문재인 대세론 맞서 개헌론 부각
야권에서는 유력한 대선 후보인 문 전 대표의 ‘대세론’ 고착화를 뒤집을 카드로 개헌론이 주목 받고 있다. 문 전 대표가 지지율에서 독주를 하고 있고, 4ㆍ13 총선 승리 이후 친노계(친문계)가 사실상 당권을 장악하고 있어, 개헌을 매개로 판을 흔들지 않고서는 문 전 대표와의 대권 경쟁이 무의미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야권에서 문 전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만이 개헌 문제에 소극적인 것도 안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한 때문이라는 평가다. 두 사람은 개헌을 한다면 대통령 4년 중임제로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의원, 이재명 성남시장 등 더민주 예비 대선주자들이 공통적으로 분권형 개헌을 선호하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
야권의 개헌 논의가 대체로 분권형 개헌에 뜻을 같이 하는 비문계와 비박계 진영 주자들이 중간지대에 만나는 ‘제3지대론’과 이어진다는 점도 비슷한 맥락이다.
주목할 점은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야권발 개헌론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대목이다. 김 전 대표는 ‘비패권 지대’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임기 단축 공약을 내걸고 개헌을 주도할 차기 대선주자를 모으고 있다. 그는 김무성 전 대표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접촉면적을 여권 인사들로 넓히고 있다. 게다가 정계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손학규 더민주 전 상임고문까지 3지대행 선언을 할 경우 야권에서 개헌론이 불타오를 수 있다.
더민주 한 중진 의원은 “친문계 패권주의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문 전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된다면 본선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냐”며 “새누리당과 국민의당 그리고 더민주 비문계가 개헌에 찬성하면 문 전 대표가 고립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반기문 대통령- 안철수 책임총리’ 식의 연정이 성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개헌 필요성엔 공감하지만 각론 이견 커 실제 개헌은 미지수
이런 정치 여건상 방아쇠만 당겨진다면 개헌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는 분석이 많다. 정치권은 이미 1987년 이후 30년간 이어져온 현행 헌법체제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개헌에 동의하는 현직 의원 규모는 역대 최다다. ‘20대 국회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은 185명으로 시작해 현재 190명 규모로 세를 불리고 있다. 이달 내 국회 차원의 개헌특별위원회 구성도 추진되고 있다. 이들은 모임 규모가 개헌안 국회의결 정족수인 200명(재적 의원 3분의 2)을 넘게 되면 전체 회원 명단을 공개할 계획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20대 국회 개원부터 개헌 ‘애드벌룬’을 띄운 데 이어, 개헌 전도사로 불리는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은 이번 국정감사가 끝나는 대로 여야 지도자를 만나 개헌 특위 구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기ㆍ임채정ㆍ정의화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원로급 여야 원내외 유력인사 150여명으로 구성된 ‘나라살리는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도 지역별 공청회와 토론회를 준비하는 등 여론 형성에 앞장서고 있다.
여전히 개헌 동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구체적인 개헌 방향 등 각론에 있어서는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개헌은 한마디로 게임의 룰을 바꾸는 건데 친박계와 비박계, 친노계와 비노계, 제3지대까지 크게 5개 세력이 이해관계를 절충하기가 쉽지 않다”며 “87년 개헌도 당시 민정당과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의 3개 정파가 개헌에 대한 각론까지 합의한 상태에서 실제 개헌까지 상당한 진통이 따랐다”고 지적했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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