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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대리전

입력
2016.10.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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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당사자가 상대방과 직접 싸우지 않고 제삼자를 내세워 상대방과 싸우게 하는 전쟁을 뜻한다. 영어로는 프락시 워(proxy war)다. proxy의 어원은 라틴어 procuratia인데, 후자는 ‘대신, 앞에서(pro) + 관여하다, 조심하다, 배려하다(curare)’라는 의미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틴어 동사 curare에서 ‘큐레이터’라는 말이 생겨났다.

주주총회에서의 위임장 쟁탈 경쟁을 프락시 파이트(proxy fight)라고 한다. 통계학 등에는 대리 변수(proxy variable)라는 개념이 있다. 비만도를 대신 측정하는 체질량 지수라든가 삶의 질을 대신 측정하는 일인당 국내총생산(GDP)과 같은 것이 대리 변수다. 정보통신기술에서 프락시 서버란 원래 서버의 역할을 대신하는 서버를 가리킨다.

중동의 시리아 및 예멘에서 벌어지는 전쟁 내지 내전은 시아파 이란과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대리전이라고 알려졌다. 며칠 전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동맹군은 예멘 수도 사나에서 민간인 장례식장을 공습해서 최소한 140명을 사망하게 하고 50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공습 피해를 본 장례식은 예멘 시아파 후티 반군 정권의 내무장관의 아버지 장례식이었다.

사우디 예멘 공습은 시리아에서 러시아군의 공습이 벌어진 다음에 벌어진 것이며, 또한 사우디가 주된 소송 대상인 ‘9ㆍ11 소송법’이 오바마 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미 의회에 의해서 무력화됨으로써 통과된 후에 벌어진 사건이다. 사우디는 보유하던 미 국채를 대량 매도하겠다는 위협을 하면서 그 법 통과를 저지해 왔다. 대리전으로서의 시리아 내전에서는 각기 미국과 사우디가 같은 편, 그리고 러시아와 이란이 같은 편이다.

한자어 대리의 리(理)는 본디 옥(玉)을 가공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옥은 귀한 보석이면서도 가공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이치, 도리, 원리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회사나 은행의 대리는 사장, 부장, 과장 등을 대신하는 사람을 뜻했는데, 오늘날에 그 자체로 직책이 되었다. 군대의 계급 루테넌트(lieutenant)도 어원은 대리인이란 뜻인데, 캡틴의 바로 아래 계급이거나 부관이란 의미다. 종교의 경우에도, 대리인들이 있다. 이슬람의 칼리프(caliph)는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란 뜻이고, 기독교의 목사(비커ㆍvicar)는 신을 대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명사 vicar로부터 형용사 vicarious(대리의, 간접적인)가 나왔다.

냉전 시기에는 대리전이 많았다. 분쟁 당사자가 대리전을 수행하는 방식은 주로 군사 원조, 군사 고문단의 파견, 또는 특수부대의 파견 등이다. 대리전이 격화되어 당사자가 직접 개입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미국의 경우로는 6ㆍ25와 베트남전쟁이 있고, 소련의 경우로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있다. 시리아 내전의 경우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두 나라가 직접 개입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예멘 내전에서는 사우디가 직접 개입하고 있다.

대리전이란 말은 국가 간 전쟁이나 내전 이외에 정치, 외교, 사회, 예능,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도 쓰인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일본, 필리핀 등을 내세워 중국과 외교적 대리전을 벌인다. 한일 간 축구 경기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에 관한 상징적 대리전이다. 연예계에서 걸그룹들 사이의 경쟁은 기획사들의 대리전이다.

민법에서 대리인은 어느 정도 자유재량을 가지기 때문에 당사자의 의사를 단지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사자’와는 다르다. 한편, 잠자는 주인을 대신해서 집을 지키는 개를 번견(番犬)이라고 한다. 번견은 ‘바지사장’이라든가 ‘가오 마담’에 비해서 더 경멸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국 정치 현실에서 ‘바지 사장’의 반대말은 ‘비선 실세’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여당 국회의원들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과 여소야대의 의회 사이에서 대리전을 수행하고 있다. 대통령을 대신해서 정치 공습을 펴던 어느 여당 국회의원은 야당 대표를 간첩에 빗대는 등 막말을 했다. 그에 대해서 야 3당은 그 여당 의원에 대해 국회 윤리위원회 제소를 추진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글 끝에 요새 SNS에서 유행하는 해시태그를 붙인다. “#그런데최순실은?”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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