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예술의 역사는 검열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구속, 고문 같은 물리적 폭력부터 인사조치, 예산차감 등 전략적 배체까지, 정부의 문화ㆍ예술 길들이기는 점점 더 교묘하고 집요해지고 있다.
군사독재정권은 대북 반공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예술인에 대한 물리적 검열과 탄압이 무제한적으로 이뤄진 시기다. 1965년 2월 영화 ‘7인의 여포로’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 영화가 단순 제재가 아닌 형사 처벌 대상이 된 첫 사례다. 그 해 7월에는 같은 혐의로 작가 남정현이 단편소설 ‘분지’ 때문에 구속됐다. 이어 1970, 80년대엔 리영희, 신동엽, 계간 창작과비평이 줄줄이 판매금지 당하면서 본격 ‘금서의 시대’가 열린다.
당시의 예술인 탄압을 대표하는 것은 1970년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 사건’이다.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을사오적에 빗대서 비판한 이 시로 인해 시인과 시를 게재한 잡지 ‘사상계’ 대표ㆍ편집위원까지 전부 구속됐다. 김지하 시인은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배후인물로 재구속되고 1975년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다시 구속되는 등 198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까지 10여 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80년대 신군부 하에서도 이념에 대한 검열은 계속됐다. 민중미술, 노동문학에 대한 탄압이 특히 심했다. 1982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대설 남’이 판금됐고, 1985년 젊은 미술인들이 합동으로 연 전시 ‘한국미술 20대 힘’은 경찰이 전시장을 봉쇄하고 작품 30여점을 강제 철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창립하게 된다. 민미협은 87년 박종철군을 추모하는 ‘반고문전’을 개최하지만 경찰이 전시장을 폐쇄하고 작품을 철거해버렸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 기관에 의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탄압은 줄어 들었다. 1990년대 들어 청소년보호법이 생기면서 정부의 검열은 주로 청소년 유해매체에 맞춰진다. DJ.doc, 조PD, 박진영 등 대중가요 가수들의 노랫말 중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거나 저속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됐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화계 진보 인사 물갈이가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코드 인사를 시정한다는 명분 아래 이어진 ‘좌파 세력’ 축출의 결과로,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문화예술계 주요 기관장들이 해임 당하거나 표적 감사의 대상이 됐다.
이동연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은 과거 보수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문화ㆍ예술계 탄압 양상이 다소 다르다고 분석했다. 그는 “사람을 구속시키거나 판매금지를 시키지는 않지만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리스트를 만들어 아예 지원 대상에서 배제해 버리는 다소 치사한 방식”이라며 “박근혜 정권은 여기에 박정희 풍자나 세월호 비판을 철저하게 금지시키는 태도가 더해지는 것이 특징인데, 이 정권에 ‘전제군주적’ ‘여왕님’이란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라고 말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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