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답변하지 마.”
잔뜩 화가 난 두 사람이 나눈 대화처럼 들립니다. 지난 10일과 11일 각각 열린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미방위) 국정감사에서 각기 논란이 된 말들입니다. 서로 다른 시점에서 쓰인 말들이었으나 불쾌감을 꽤 유발한다는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국정감사에서야 해마다 각종 구설과 화제가 일어난다지만 올해 미방위 국감에서는 때아닌 ‘답변’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전자는 10일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산주의자”이냐는 야당 의원의 거듭된 질문에 내 놓은 말이고, 후자는 ‘이정현 녹취록’ 의혹과 관련해 야당 의원의 질문을 받은 KBS 보도본부장을 향해 고대영 사장이 한 말입니다.
말을 던진 상대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말에는 공통적으로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습니다. 또 그 의지만 뚝 떼어놓고 보면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국회에서의 증언ㆍ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3조에 따르면 국정감사 등 국회에 출석한 증인에게는 증언은 물론 선서와 서류 등의 제출까지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부 이유를 소명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법이 이들에게 ‘답하지 않을 의지’ 자체는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발언이 이런 법의 보호와는 무관하게 국민적 질타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MBC와 KBS란 양대 공영방송을 관리감독 및 경영하는 두 수장들이 법적 권리를 스스로 남용하거나 오용했기 때문입니다.
고 이사장은 문 전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언급해 최근 법원의 3,0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은 사실과 관련해 국감에서 집중 공세를 받았습니다. “문 전 대표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를 법원에 제출했다” “(공산주의자라는)사실을 알고도 문 전 대표를 지지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말한 것” 등 국감 초반부터 자신의 입장을 거침 없이 쏟아내던 고 이사장은 종반부 김경진 국민의당 의원의 “문재인 전 대표가 공산주의자입니까?”라는 거듭된 질문에 이렇게 맞섭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추론이 또 길어질 테고. 증언을 거부할 수 있는 국회법에 따라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고 이사장은 지난해 국감에서도 똑같은 질문에 “솔직하게 말하면 국감장이 뜨거워지고,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 하면 법정에서 불리해지니 말씀 드리지 않겠다”며 답변을 거부했다가 야당 의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는 등 논란을 일으켰던 전례가 있습니다.
고 이사장과 달리 국감에 처음 출석한 고 사장은 답변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잘못 행사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 사장과 함께 증인으로 출석한 김인영 보도본부장에게 KBS 뉴스가 ‘이정현 녹취록’을 왜 보도하지 않았냐고 묻자 고 사장은 “답변하지 마”라며 반말로 지시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만일 질의를 받은 당사자인 김 보도본부장이 소명을 밝히며 답변을 거부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겁니다. 그에게도 답변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 이유와 내용에 따라 의원의 추가 질의를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고 사장의 발언은 다른 증인의 증언을 가로막아 감사를 방해하는 행위가 돼 버렸습니다. 더군다나 국민이 지켜보는 국감에서 부하직원에게 반말로 지시를 내리는 고압적인 자세까지 도마에 오르며 KBS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는 평가가 오가고 있습니다.
양일간 현장에서 국감을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이 스쳤습니다.
두 사람이 경력의 대부분을 검사와 기자로 각각 살아온 만큼 질문과 추궁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생긴 해프닝 정도로 사안을 단순화해 보려고도 했습니다. 증인으로 출석한 기관장들을 마치 범죄자라도 되는 듯 몰아붙이는 데만 급급한 일부 의원들의 태도에 눈살이 찌푸려진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정성과 독립성이란 존재 가치가 점점 무너지고 있는 공영방송의 현실을 떠올릴 때 두 수장의 ‘답변 거부’를 지지해 줄 국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이란 전제로 이미 야당의 전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확신한 고 이사장과 ‘언론자유 침해’를 앞세워 국감 질의를 가로막은 고 사장. 이날 국감을 보며 두 사람의 MBC와 KBS가 국민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습니다. 법과 규정과 윤리를 유리한 방식으로만 해석하려는 두 사람의 태도가 공정성을 잃은 공영방송의 뒤틀린 현실을 보여주는 듯해 씁쓸했습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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