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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과 '자백'을 둘러싼 충무로 괴담, 진실 혹은 거짓

입력
2016.10.1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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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이나 그렇듯 영화계에도 ‘카더라 통신’이 존재합니다. 치열한 흥행 전쟁이 펼쳐지고, 그 결과에 따라 희비 곡선이 뚜렷하게 엇갈리는 곳이라 소문이 더욱 위력을 발휘합니다. 어떤 배우는 정권에 미운 털이 박혀 정부 행사에 초청을 못 받는다는 풍설은 그나마 애교. 어떤 투자배급사는 좌파 영화를 만들었다가 세무조사를 당했다는 무시무시한 괴담도 나돕니다. 소문이라고 다 사실은 아니겠으나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습니다. 최근 충무로에도 정체 모를 풍문이 몇 개 떠돌고 있습니다. 진위 여부를 하나하나 따져보았습니다.

영화 '밀정'은 정권에 밉보여 투자를 받기 어려웠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밀정'은 정권에 밉보여 투자를 받기 어려웠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국내 투자배급사는 영화 ‘밀정’의 투자를 정말 꺼렸나?

지난해 말부터 충무로에선 ‘밀정’ 괴담이 돌았습니다. 제작사 대표와 출연 배우가 정권이 싫어하는 인물들이라 ‘밀정’이 국내 투자를 받지 못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밀정’의 제작사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로컬 프로덕션의 최재원 대표는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변호인’의 제작자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의 주인공 송우석은 송강호가 맡았습니다. 영화는 관객의 환대를 받았으나 현 정부 핵심 인사들의 반감을 샀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최 대표와 송강호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밀정’은 여러모로 투자자들의 눈길을 끌 만합니다. 송강호와 공유가 주연하고, 할리우드에서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주연으로 ‘라스트 스탠드’를 연출한 김지운 감독의 충무로 복귀작이니까요. 최근 충무로의 새로운 금맥으로 떠오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했으니 빅4(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NEW)라 불리는 국내 주요 투자배급사들이 군침을 흘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밀정’의 투자배급은 미국 대형 스튜디오 워너브러더스 몫이었습니다. 정권의 압력이 작용해 빅4가 투자에 나서지 못했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렇습니다. 한국 영화 제작에 뛰어들고 싶었던 워너브러더스가 지난해 워너브러더스 로컬 프로덕션을 설립하며 위더스필름 대표인 최 대표를 영입했습니다. 어느 날 영화사 하얼빈의 이진숙 대표가 최 대표를 찾아 시나리오 하나를 건넸고, 최 대표는 “워너에서 함께 하자”며 ‘밀정’ 제작에 나섰습니다. 최 대표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함께 만들었던 김지운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준 뒤 연출을 부탁했고, 김 감독도 흔쾌히 참여했습니다. 이후 최 대표, 김 감독과 오랜 인연을 지닌 송강호가 캐스팅 되며 ‘밀정’의 제작 밑그림이 완성됐습니다. 뒤늦게 ‘밀정’의 진용을 알게 된 빅4도 탐을 냈으나 워너브러더스가 먼저 찜을 한 모양새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밀정’을 둘러싼 외압설과 국내 투자배급사들의 투자 기피설은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김명민 주연의 원전 재난영화 '판도라'는 민감한 소재 때문에 투자에 애로를 겪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진은 '판도라'의 박정우 감독의 전작 재난영화 '연가시'의 한 장면.
김명민 주연의 원전 재난영화 '판도라'는 민감한 소재 때문에 투자에 애로를 겪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진은 '판도라'의 박정우 감독의 전작 재난영화 '연가시'의 한 장면.

‘판도라’는 원전 재난영화라 투자를 제대로 못 받았나?

김명민 김남길 주연의 영화 ‘판도라’를 두고도 말이 많습니다. ‘판도라’는 국내 한 원자력발전소에 위기가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린 재난 블록버스터입니다. 2012년 ‘연가시’로 451만 관객을 만난 박정우 감독의 신작입니다. 100억원 가량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로 지난해 7월 25일 촬영을 마쳤으나 1년 넘도록 후반작업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개봉이 늦어지다 보니 외압설이 나돌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원전을 다루고 있어 관계 당국의 압박을 받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떠돌고 있는 거지요. 정부기관이 관여된 모태펀드의 투자를 받기로 했다가 투자 철회가 되면서 ‘판도라’를 둘러싼 음모론은 설득력을 얻게 됐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는 한국영화 활성화를 위해 7개 조합을 통해 한국영화 185편에 1,186억원(이상 지난해 12월 기준)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외부 투자기관에 투자할 영화 선정과 투자금액 등을 위탁하는 형식을 띠고 있어 영진위가 투자에 세세히 관여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계에선 모태펀드가 투자 결정을 철회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라며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판도라’의 투자배급사인 NEW(뉴)는 투자 철회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밝힙니다. 다만 모태펀드의 투자 철회로 다른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데 애를 먹었다고 주장합니다. 모태펀드의 투자 철회는 영화 시나리오와 출연 진용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뉴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 개봉도 미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고 답변합니다. 컴퓨터그래픽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라 완성도를 위해 후반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공개가 늦어지고 있다고 밝힙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국가정보원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상영관을 잡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엣나인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국가정보원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상영관을 잡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엣나인 제공

멀티플렉스는 국정원 눈치에 ‘자백’ 상영을 꺼리나?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국가정보원의 간첩 조작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탈북자 신분으로 서울시 공무원이 됐다가 간첩 혐의로 구속돼 무죄 판결을 받은 유우성씨 사건을 중심으로 국정원이 관여된 여러 의혹들을 추적합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잘못을 따져 묻는 장면 등 인화성 강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라 충무로에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습니다. 감독은 MBC 시사프로그램 ‘PD수첩’으로 유명한 최승호 PD입니다. 해직 뒤 대안언론을 표방한 뉴스타파에 들어간 최 PD가 국정원의 간첩 조작 의혹을 취재한 뒤 만든 탐사보도에 내용을 추가해 만들었습니다. 지난 5월 열린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 상 등 2개 상을 수상하며 완성도를 인정 받았습니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제대로 개봉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일었습니다. 13일 개봉을 앞두고 몇몇 매체가 대형 멀티플렉스체인 CGV와 롯데시네마가 ‘자백’을 상영하지 않을 조짐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천안함 침몰에 대한 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가 개봉관을 잡지 못해 애를 먹는 등 민감한 이슈를 다룬 영화들이 불이익을 당한 사례가 여럿이라 우려가 클 만도 했습니다. 업계 3위 멀티플렉스체인 메가박스를 제외하면 ‘자백’의 시사회도 열지 않으니 의혹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계에선 시사회 개최를 영화를 상영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의혹의 한 가운데 서게 된 멀티플렉스체인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CGV 관계자는 “비수기에 개봉작이 몰리면서 (상영 여부) 검토가 늦어져 시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소문과 달리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는 ‘자백’을 상영합니다. ‘자백’은 상영 첫날 전국 130개 가량의 스크린에서 관객을 맞이할 전망입니다. 하지만 의혹의 눈초리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멀티플렉스가 언론 비판을 우려해 마지못해 몇 개 스크린에서 ‘자백’을 상영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국정원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소문에 대해선 이들은 “스크린 수는 감독(인지도)과 예매율 등 여러 요소를 고민해 결정한다”고 밝혔습니다. ‘정치논리’가 아닌 시장논리에 따라 ‘자백’의 스크린 수도 정해질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대기업이 밝힌 내용이니 일단 믿어야겠으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떠도는 시절이라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습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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